관계의 후유증

떠난 자와 남겨진 자

by 진키

“씨발” 갑자기 욕이 튀어나온다.

나에게 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틱은 갑자기 재채기처럼 찾아온다.

수십 번 틱증상에 대해서 검색을 한다.

진단을 내리기엔 나의 증상이 너무도 애매하다.

설거지를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자려고 누웠다가.

그 틱증상은 이따금 내가 혼자 있거나

지나온 과거들을 떠올릴 때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특별한 해결방도는 없어 머리를 세차게 뒤흔든다.

물에 흠뻑 젖은 강아지처럼 사방으로 머리를 흔들고 나면

내뱉지 못한 수많은 불순한 언어와 기억들이

사방으로 흝어진다.

내게 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걱정.

아무리 잊어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장면들..

나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건 뭘까


나 자신을 지울 만큼 내 안의 중심은 늘 타인에게 있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정말로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남들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옷과 구두를 신고,

남들이 좋아할 만한 유머를 하고,

남들이 좋아할 만한 친절을 베풀면서

나는 나에게서 타인이 되어갔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람들의 부탁에도 거절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 능력 밖의 일들도 무리하게 수락하고

타인을 위한 에너지를 쏟아내었다.

누군가 다른 이를 험담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그들의 감정을 좀 더 기분 좋게

공감하기 위해

나서서 함께 험담에 동조했다.

그것이 내가 그 안에서 생존하며 관심을 끄는 방식이었다.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c가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성향의 그녀는 늘 나이에 비해서 성숙해 보였다.

그녀의 샤넬지갑엔 늘 현금이 가득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쉽게 가질 수 있어서일까

늘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녀의 쇼핑을 동행할 때 이따금 나에게 어울릴 거 같다며

작은 아이쉐도우를 건네기도 하고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사 줄 테니 골라보라고 말했다.

나도 용돈을 받기는 했지만

그녀의 씀씀이를 따라갈 만큼 여유가 있진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하면서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가고 싶은 장소를 갔다.

내 능력이상의 지출을 하다 보니

그녀와의 만남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그녀는 빈지갑을 바라보는

나를 뒤로 하고 늘 계산대로 먼저 빠른 걸음을 했다.

사람에게 빚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였던 지라

나는 그녀에게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으로

빚진 마음을 대신했다.

이를테면 남자친구와의 이별앓이에,

몸이 아파서 혼자 집에서 외로이 견디는 시간에

그녀 곁을 지켰다.

그녀가 나에게 금전적으로 베푼 은혜를 갚기 위해선

돈 없고 가난한 내가 시간이라도 내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는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들을 물건을 사모으며 채워나간다고 했다.

그녀의 유통기한이 지난 박스도 뜯지 않은 화장품들과,

사놓고 싫증이 나서 산처럼 쌓여있는

곧 버릴 옷들을 나는 쇼핑백에 가득 담아 집으로 왔다.

그러는 사이 나는 그녀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녀에겐 쓰레기에 불과했던 싫증난 옷들을 입고.

필요할 때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는 친구..


어쩌다가 남자친구들과 동행하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재미있는 사진을 보여준다며

나의 흑역사 사진들을 돌려가며 보여줬다.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지만

그래도 그 사진에 누군가가 웃었으니

분위기를 깰 수 없어 이 또한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때 그들이 보고 웃었던 것이

그녀 아래 무너진 내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그녀와 다니면서 c의 친구들을 소개받고

그 무리에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용월간지의 기자로

면접을 보던 것이 합격했다.

그 소식을 전하자마자 그녀는 내게 “네가?”라고 말했다.

그 의미를 오는 내내 곱씹으며 이 기회가 나 따위는

누려선 안 되는 기회인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녀가 내던진 옷도 은혜롭게 받아 입던 나 따위가

감히 자신도 입어본 적 없는 옷을 입게 되어서

화가 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한 번은 그녀가 내게 통장을 개설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지인이 자신의 명의로 사업을 하던 것이 잘못되어

신용불량자가 되어있어 월급을 받는 족족 차압이 된다며

자신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통장을 개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그녀는 비슷한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적어도 통장은 아니었다.

내 앞으로 수익이 잡혀서 해결하느라

진머리를 앓았던 경험이 있던지라

그런 용도라면 더더욱 빌려줄 수 없었다.

나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다닌다며?”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격양된 목소리.. 전화를 건 사람은 C를 통해 알게 된 지인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끊자마자 C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런 전화를 받았다고 전하자

C는 다른 친구의 이름을 대며 말했다.

예전에 나와 나눈 이야기를 그 친구와도 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말이 조금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단순한 오해였겠거니 하며

한시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신랑의 전화가 연이어 울렸다.


“여보… 화내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들어.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사람, C야…”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와의 카톡들이 그들 사이에서 우스운 증거처럼 돌려 읽히며,

나는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나쁜 년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을 공감하고 웃겨주려던 나의 오버스러운 표현들은

그녀의 능숙한 편집을 거쳐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c의 무리 틈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웃음거리로 소비되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사람의 관계를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기분 좋게 듣지도 동조하지도 않는다.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조용히 끄덕인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서는 '관계가 끝날 때,

내가 그 관계를 떠난 사람인지

아니면 남겨진 사람'인지 묻는 문장이 나온다.

그 문장을 읽고 난 뒤부터 나는

지나온 관계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수많은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멀어져 갔다는 사실도 함께....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늘 같은 질문 앞에 섰다.

그 관계에서 나는 어떤 위치였을까.

먼저 등을 돌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이유도 모른 채 남겨진 사람이었을까.


떠났다고 생각했던 관계에서도

사실은 마음 한 켠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고,

남겨졌다고 믿었던 순간들 역시

어쩌면 내가 먼저 놓아버린 건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묻게 된다.


관계는 끝났지만 그 관계 안에서의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지금도 질문 속에 머물러 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녀를 끝까지 믿고 싶었을까

뭐든 술술 잘 털어내는 나도 그때를 생각하면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오며 벌떡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틱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욕설을 내뱉는다.

”나한테 왜 씨발,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건강검진을 앞두고 또 걱정한다.

내게서 나가지 못했던 수많은 울분의 문장들이

마취가 깨어가는 내 입속에서 참지 못하고 쏟아질 걱정.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거렸을 때

간호사들의 차가운 눈초리와 두려워하는 시선…

마취주사가 내 몸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눈보다 아랫입술을 더 꼭 여며 깨문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