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학 생활

규칙적인 생활의 힘

by 김태은

스물셋의 남은 시간은 공부에 전념하려고 했다. 여전히 잘 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학과를 고르는 일은 의외로 쉬웠다. 문헌정보학과. 매일같이 도서관에 다니며, 도서관을 연모하게 된 나는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간은 금세 흘러 수능 시험일이 되었다.
그 날,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아빠는 집에 없었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교문 앞에는 자녀들을 위해 작은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우리 부모님이 같이 와 주길 바랐는지, 아니면 혼자가 더 편했다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추운데 여기까지 나올 필요는 없지. 나는 괜찮으니까.
그 말을 몇 번 되뇌고서야 시험장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시험은 어려웠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망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참 동안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채점을 해보니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잘하지도, 망하지도 않은, 딱 나다운 점수였다. 나는 그 점수를 가지고 갈 수 있는 학교들을 찾아보았고, 전국 문헌정보학과 순위를 정리해 둔 블로그 글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군데에 지원했는데, 다행히 모두 합격했다. 하나는 내가 살던 곳의 대학, 또 하나는 평생 가본 적 없는 도시의 대학이었다. 나는 낯선 도시를 선택했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어떤 이유보다 크게 나를 이끌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말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아 둔 돈이 있으니 혼자 살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해보겠다고. 학교에 다니면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떻게든 잘 지내보겠다고.

부모님이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들으셨을지는, 그때도 모르고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대학을 보내주기엔, 부모님에게도 쉽지 않은 사정들이 있었다.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딸을 힘껏 응원하고 싶으셨을 테지만, 안락한 시작을 마련해 줄 만한 여건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분은, 그저 그러라고 했다.
나는 그 조용한 동의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입학 준비를 하면서 처음 해 보는 일들이 많았다. 필요한 서류들을 직접 챙기고, 생애 첫 자취방을 구하러 다녔다. 기숙사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4인 1실이라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또래 여자아이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여전했고, 잠깐의 대화도 어려워하던 내가 누군가와 하루종일 부딪히며 살 수 있을 거라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작고 어두웠지만 비교적 깔끔한 방을 하나 구했다. 조그만 짐을 들고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는 길, 나는 묘하게 가벼워졌다.






3월,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모든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장학금을 받고 싶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은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 1년 치 방세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앞으로를 버티려면 매일 반나절 이상 일을 해야 했고,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처럼, 수영을 할 때처럼, 일정하고 꾸준하게.


동기들과의 관계는 무난했다.

솔직히 말하면, 여자아이들과는 데면데면했다. 잘 지내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게 조금 속상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이들도 나를 편하게 대하진 못하는 눈치였다. 그들에겐 내가 같은 동기가 아니라, 나이가 많은 '4학년 선배'와 비슷한 존재처럼 보였던 것 같다. 나보다 어린 선배들도 비슷했다. 나이가 더 많은 후배를 대하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학교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도 새로 구했다. 학교 앞 PC방이었다. 오후 4시부터 밤 9시까지가 나의 시간이었다. 시급은 조금 적었지만, 자리에서 계산을 하고 사람이 나가면 자리를 치우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손님이 없으면 공부를 해도 된다는 사장님의 말이 고마웠다. 나는 그곳에서 천천히 생활의 균형을 찾아갔다.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같은 과 남자 동기 무리를 자주 마주쳤다. 다섯 명의 스무 살 아이들. 그 아이들은 한창 노느라 바빴고 거의 매일 PC방에 와서 거의 매일 나와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불렀고, 시시한 얘기들을 건넸다. 두 세 달쯤 그렇게 지내자, 낯을 많이 가리던 나도 어느새 그 무리에 조금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게임을 시작했고, 그들은 내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날 무렵에 일부러 맞춰 PC방에 들러 함께 게임을 했다. 자연스럽게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고, 학식도 함께 먹으러 갔다.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엔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 남들이 말하는 ‘대학생활’을 그들 덕분에 함께 누리게 되었다. 즐겁고, 잔뜩 웃는 날들이 예상보다 많이 생겨났다. 그들과의 연은 대학생활이 끝나며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맙고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좋은 날만 있던 건 아니다.

구체적인 장면들은 다른 서글펐던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희미해졌지만,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던 일들도 여전히 많았다. 낮에는 활기를 찾다가도, 밤이 되면 다시 어두워졌다. 낡고 좁은 자취방 안에서, 절반 이상은 불안에 떨며 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들어 둔 규칙적인 생활이 나를 가라앉지 못하게 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했고, 아르바이트도 나가야 했고, 과제도 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꼭 해야 하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밤에는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 되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어떻게든 학교로 향했다.


그 힘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에 지쳐 학교를 그만두거나 냅다 휴학계를 내버리던 사람이 아니게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즐겁던 나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기들은 군대에 가기 시작했고, 2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모두 떠났다.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의 혼자는 전과 달랐다. 밀려난 고독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로 고른 간격을 유지하는 고독. 그건 이상하게 편안했다.


완전히 혼자였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준비하면, 다정하게 인사하며 옆자리에 앉는 동기나 후배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평연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표로 했던 장학금도, 항상 전액은 아니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내내 받을 수 있었다. 내 성적이 좋다는 사실은 언젠가부터 학과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조별과제를 할 때마다 늘 나와 함께 하자고 먼저 말해주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게 그 시절의 나에게 어울리는 거리감이었다.


여자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기— 그 목표는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친구가 생겼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냈고, 장학금도 받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방세를 충당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대학생활은 내가 그 시기에 소망했던 것들은 대부분 이루어낸 시간이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괜찮은 나날들이었다.


그때의 나는, 한밤의 우울에 허덕이는 스스로가 여전히 한심하다고 느꼈다. 열일곱 때와 똑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아 자책도 많이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아주 많이 나아져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을 뿐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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