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의 주인 잃은 화분들
어느 도서관이든 이름 없는 화분이 있다. 특히 사무실에 많다. 우리 사무실의 경우, 한때는 뒷편 창가에 열댓 개가 줄을 지어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으면, 모니터 너머로 화분들이 느슨한 행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식물들. 누군가는 고무나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냥 풀이라고 했다. 공무원이 일하는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종류들이다. 잎은 늘 반짝이지도, 완전히 시들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의 공기와 타협한 결과처럼.
이렇게 많은 화분이 사무실에 존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공무원은 주기적으로 자리를 옮긴다. 짧게는 반년, 대개는 2년 안쪽이다. 이동은 규칙에 가깝다. 그래서 이곳의 책상과 서랍은 언제나 임시적이다. 오래 머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두가 지나가는 중이다.
자리를 옮길 때,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난다. 그 경계에서 공무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가 있다. 대개는 화분이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맡기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잘 키워달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그 뜻이 포함된다.
요즘 젊은 직원들, 흔히 말하는 MZ세대는 화분을 선호하지 않는다.
“죽이기만 해서 죄책감 들어요.”
그 말은 대체로 진심이다. 그들은 차라리 간식이 낫다고 말한다. 먹을 것은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남은 책임도 없다. 실제로 요즘은 간식거리를 선물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여전히 40대 후반 이상의 직원들, 특히 6급 이상의 분들은 화분을 선호하는 것 같. 그리고 만약 5급 이상이 이동하는 날이면, 그 사무실에는 온갖 종류의 화분이 몰려든다. 난초, 스투키, 이름 모를 관엽식물들. 잠시 동안 그 공간은 사무실이라기보다 작은 식물처럼 보인다.
어떤 이는 수많은 화분을 받고, 어떤 이는 작은 스투키 하나만을 받는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얼마나 많은 관계를 거쳐왔는지. 일종의 사무실풍 바코드 같은 것이다. 나는 가끔 그 화분들을 보며,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정보들을 읽어낸다.
그렇게 하나둘 쌓인 화분들은, 시간이 지나며 주인을 잃는다. 돌봄은 책임이 되고, 책임은 결국 가장 가까운 자리로 흘러간다. 화분에 가장 가까이 앉은 사람이, 그 화분을 보살피게 된다. 그것은 규정도 아니고, 지시도 아니다. 단지 거리의 문제다. 가까이 있으면 잎의 색이 먼저 보이고, 흙이 마른 것도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보게 되면, 아주 작은 책임감이 생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그 자리에 앉은 직원은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식물의 생명에 부담을 느꼈다. 몇 번은 물도 주었다. 그러나 화분이라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관심과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한 존재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감당할 만큼의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선택에 가까웠다.
반 년이 지나고, 열댓 개의 화분은 세 개로 줄었다. 남은 세 개는 어지간히 강한 종류였거나, 아니면 이미 버려진 상태로 살아가는 법을 익힌 존재들일 것이다. 물이 오지 않는 날에도 버티는 법, 관심받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사무실이 언젠가는 화분 하나 없는 공무원 사무실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창가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고, 책상 위에는 모니터와 서류만 남은 공간.
그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그날이 오면, 이 사무실은 지금보다 조금 더 솔직해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