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도서의 아이러니

버려도 문제, 안 버려도 문제

by 김태은

도서관의 책은 사실 소모품에 가깝다. 누군가 커피를 엎지르거나, 곰팡이가 스미거나, 페이지가 찢기면 그 순간부터는 제 역할을 잃는다. 하지만 지자체의 눈에는 책이 ‘자산’으로 분류된다.

자산은 쉽게 버릴 수 없다. 책은 죽는 순간조차, 조용히 사라질 수 없다. 장례식 대신, 복잡한 행정 절차를 따라야 한다.


책을 버린다는 건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다. 먼저 버릴 책을 추려 목록을 만든다. ‘훼손’, ‘3년간 대출 없음’, ‘분실’ 같은 사유를 일일이 붙인다. 이 과정은 마치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는 일과도 닮아 있다.

다음으로 계획을 세우고, 교수와 지역 인사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그들이 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통과가 되면 그제야 트럭이 와서 책을 싣는다. 노끈에 묶인 책더미가 트럭에 오르는 장면은 묘하게 장송 행렬을 닮아 있다. 마지막으로 도서관리시스템에서 제적 처리하여 더 이상 검색되지 않게 한다.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순간. 책은 그렇게 사라진다.


문제는 운영위원회에서 생겼다. 한 위원이 “아깝다”고 말했다. 아직 멀쩡한 책들을 버리는 게 아니냐며.

사서의 눈에는 눅눅하고 곰팡이가 핀, 부패한 종이더미에 가까웠지만, 보존서고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은 이상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고개들이 천천히 끄덕였고, 간부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답했다. 그 말 한마디가 새로운 사업을 불러왔다.


우리는 폐기도서를 재활용하기로 했다. 다른 지자체에서 이미 무상 나눔이나 1천 원 판매를 하는 사례가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벤치마킹했다. 말만 들으면 괜찮아 보이는 일. 그러나 이미 썩어버린 책 수만 권을 떠안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딘가 맞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간부가 “하겠다”라고 결정했으니, 우리는 해야만 했다.


그 길의 첫 관문은 조례 개정이었다. 선거법에 위반되지 않기 위해, ‘주민에게 폐기도서를 무상 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새로 넣어야 했다. 몇 달이 걸리는 절차였다. 그 일을 맡은 직원은 본래의 업무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짐만 얹게 되었고, 점점 지쳐갔다.

수많은 문서를 만들며 어깨를 굳혀가던 그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책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사람의 기운이 먼저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례 개정을 심의하는 의회가 문제 삼았다.

“다 낡아 버려야 할 책을 주민에게 준단 말입니까?”

그 한마디는 회의실을 가득 메운 정적보다 더 무거웠다.


책을 버려도 문제였다. “왜 아직 쓸 만한 걸 버리냐”는 지적이 따라왔다. 책을 나눠도 문제였다. “왜 낡아빠진 걸 주민에게 주느냐”는 반발이 이어졌다. 책은 이미 죽었는데, 누구도 그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중의 족쇄에 묶였다. 책은 도서관의 서가에서조차 자유롭게 죽지도, 다시 태어나지도 못했다. ‘자산’이라는 이름 아래, 책은 여전히 묶여 있었고, 그 곁에서 일하는 사서들 역시 함께 묶여 있었다.


책을 버려도 문제, 나눠도 문제. 어느 쪽이든, 우리는 무얼 해도 문제가 되었다. 책조차, 사서조차, 제대로 사라지지도 살아나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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