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씨앗처럼 남은 시간들
잘 될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대학에서 휴학하게 되었을 때, 그건 내게 두 번째 실패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자퇴. 그리고 대학 입학 첫 해의 휴학.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옥상에 올랐고, 손목 위에 칼을 가져다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살아가지도 못하고, 죽을 용기조차 없던 나는 어딘가에 멈춰 선 사람 같았다.
그 시절의 기억은 물속에 오래 담가두었다 꺼낸 사진처럼 흐릿하고 얼룩졌다.
떠올리려고 하면 손끝에서 부서져 사라지는 느낌.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또렷한 건 단 하나, 어두운 방의 풍경 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누구와 이야기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작은 움직임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것 같다. 아마 2년쯤 지난 뒤였을 것이다.
그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미약한 울림이었다.
돌이켜보면 열일곱 때도 그랬다. 오래 이어진 어둠 끝에서야 겨우 걸음이 다시 떼어졌었다.
아마도 나는 무너지고 일어서기까지 언제나 2년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더 컸다. 복학도, 새로운 대학도 모두 무서웠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몸을 꾹 싸매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집 밖으로 나섰다. 겨울이었을 것이다. 검은 패딩 속의 내 몸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빙글빙글, 목적 없이 걸었다. 걷는다는 느낌 자체가 좋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소하게 웃고, 통화를 하고, 장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습이 멀리서 빛처럼 보였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책 끝에, 발은 자연스럽게 집 앞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자주 갔던 곳.
문을 열자 오래된 먼지 냄새와 종이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 익숙한 감각이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
자료실은 고요했다. 직원들은 이용자를 뚫어지게 보지 않았다. 판단하려는 눈길도 없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했다. 나는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몸을 밀어 넣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도서관에 갔다.
책장 사이를 아무 목적 없이 걸었다. 책등의 색, 종이의 결, 제목의 리듬 같은 것들을 바라보다 끌리는 책을 자연스레 골라 들었다.
사람들 사이 책상에 앉아 읽고 싶지 않았기에 책을 품에 안은 채 조용한 방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면 그 책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철학, 심리학, 사회과학, 예술, 문학, 역사—
000부터 900까지, 숫자와 주제가 뒤섞인 제각각의 세계들이 방 안에 펼쳐졌다.
나는 그 책들을 읽는다기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세계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쪽에 가까웠다.
열일곱부터 쭉 이어진 불면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버리고 싶은 장면들이 어둠 속에서 줄줄이 떠올랐고, 머리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생각 비우기 연습』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은 내게 생각은 비워낼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것임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나는 그 책을 새로 구입해, 너덜해질 때까지 펼쳐보며 매일같이 마음 비우는 연습을 했다.
그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생각을 비우는 방법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때의 연습이 작은 씨앗처럼 내 안에 남아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책에 파묻혀 지내는 동안 나는 아주 천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긴 겨울 끝에서 얼음이 녹아내리듯, 눈에 띄지 않는 변화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