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손님으로 찾아온 과거
스물 둘, 나는 결심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멈춰 있던 시간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길 바랐다. 그 작은 바람이 가슴 안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를 뒤적이다 집 바로 앞 편의점 공고를 발견했다. '방문 후 협의'. 그렇게 쓰여있었던 것 같다. 그 짧은 연속된 단어들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버튼 하나로 해결되는 방식이 아닌, 누군가를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방문 후’라는 말이 어딘가로 밀어내듯 나를 움직였다. 나는 옷장 속에서 그나마 말끔한 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몇 마디 문장을 연습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안쪽의 형광등은 지나치게 밝았다. 카운터 안에 있던 사람에게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짧게 물었다.
“이력서는?”
그 말이 바닥에 떨어진 동전처럼 울렸다.
나는 준비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말하고 다시 계산대로 돌아갔다. 대화는 허공에서 끊겨버린 선처럼 그 자리에서 끝났다.
문구점에서 이력서 용지를 샀다. 종이는 생각보다 매끄러웠고 빈칸들은 이상하리만치 넓어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고등학교 자퇴.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적어야 할까.
내가 고용주라면 자퇴한 사람을 뽑을까.
숨을 들이마시는 일조차 무거워졌다.
열일곱의 선택이 앞으로도 오래 나를 따라다닐 거라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실감했다.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만을 적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숨기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 손끝에 묘하게 남았다. 그 결정 하나가 내 지난 4년의 시간을 통째로 다시 건드리는 듯했다.
편의점에 다시 갔을 때 아르바이트 자리는 이미 없었다.
나는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길 위로 걸어 나왔다.
또다시 구인 사이트를 훑었다. 이번엔 파란 간판의 프랜차이즈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력서를 들고 방문하니 그곳 주인은 서류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내일부터 바로 나올 수 있어?"
그렇게 나는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래 멈춰 있던 시간이 잠잠하게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매니저 언니는, 이미 여러 아르바이트생에게 수없이 같은 설명을 했던 사람처럼 모든 일을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었다.
갈색 쟁반 위의 빵들을 보고 이름을 떠올리고, 음료 주문이 있다면 순서를 떠올려 만들고, 포인트 카드가 있는지 확인하고, 카드는 단말기에 긁고, 현금이면 잔돈을 차분히 세어 건네고, 마지막엔 “감사합니다” 하고 웃는다.
빵을 바코드로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모양과 이름을 외워야 했다. 약간 어렵긴 했지만 어서 잘하고 싶어서, 집에서도 빵 사진을 보며 이름을 외웠다. 음료 제조법도 일일이 메모하고 반복해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거의 모든 빵과 음료 제조 방법을 기억하게 되었다. 매니저 언니는 기억력이 좋다며 칭찬했다.
그 이후부터는 매일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었다. 손님을 응대하고, 손님이 없으면 철판을 닦고, 매장을 정돈했다.
그 반복은 잔잔한 파도 같았다. 그 파도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내 마음의 표면도 서서히 평평해졌다.
아무도 나에게 이상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필요한 말들만 오갔고, 그 덕분에 나는 사람들 틈에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바라던 ‘평범’이라는 것에 조금 닿아가는 느낌이었다.
위기는 몇 달 뒤,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손님으로 고등학교 동창이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마치 오랫동안 찾던 물건을 발견한 사람처럼 단번에 알아보았다.
"너 H 아니야? 맞지?"
"나야, Y! 벌써 잊었어? 너무하네."
그 목소리는 오래된 서랍을 열 때 나는 소리처럼 기억의 밑바닥을 슬쩍 긁고 지나갔다. 활기차고, 가벼웠다. 그런 종류의 사람을 나는 어쩐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학교를 그만두고 무엇을 했는지, 지금은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여기서는 얼마나 일했는지.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말들을 꺼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학교는?”
나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휴학 중이야.”
그 말이 채 공기 중에 흩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야, 학교 좀 제대로 다녀!”
그 목소리는 불필요할 정도로 경쾌했다.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묘하게 찬 기운을 품고 있었다.
햇빛이 가득한 오후였는데, 순간적으로 가게 안의 온도가 한 걸음쯤 내려앉은 느낌이 들었다.
이후의 대화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말 몇 마디가 스쳐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툭 떨어져 사라졌다.
다만 그 순간,
내 안 어딘가 깊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묻어두었던 문장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나는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들 다 하는 것도 못하는 사람이다.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이다.
어린아이가 긴 시간 몰두해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쌓아 올린 블록 성. 그 성의 한 모서리를 심술궂은 어른이 손끝으로 툭— 건드리듯,
내가 간신히 쌓아올린 작은 회복들,
조심스레 다시 걷기 시작했던 모든 발걸음이
그렇게 사소한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