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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Jul 31. 2022

천 개의 파랑

딴생각을 하면 안 됐는데 문득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2학기에 있을 독서 멘토링 토론대회에 대해 K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연락을 했고, 언니는 하나의 책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었는데, 그 책이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이었다. 표지의 색이 푸르고 눈에 띄어서 제목은 익숙한 책이었지만 요즘 작가들에 별로 흥미가 없던 터라 그냥 넘겼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서가에서 이 책을 찾았을 때 표지에 적혀있던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이라는 소개에 음..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리고 작가의 사진과 이력을 보는 순간 한 번 더 아.. 이거 내 취향 진짜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첫 장을 펼쳤다.




이건 이 이야기의 결말이자, 나의 최후이기도 하다. 008


이 한 줄의 문장으로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이 문장이 나를 다음으로 이끌었다.


C-27 로봇 콜리와 우연재, 콜리와 투데이, 그리고 연재의 언니 우은혜와 엄마 보경, 연재의 친구 지수 등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2035년의 이야기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플롯이 탄탄하고,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소설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주로 읽었던 나에게 2035년 미래 이야기는 매우 신선한 느낌이었다.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행복이 만병통치약이거든."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205


"저는 호흡을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느껴요. 옆에 있는 당신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괜찮지 않나요?" 302


그리움에 대해 그리고 행복과 불행에 대해, 외로움에 대해, 소외감에 대해 이 소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다. 행복은 어떻게 그리움을 이기게 되는지, 불행이 어떻게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외로움은 어떻게 달래며 살아야 하는지, 소외되는 인간은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찾아 나선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낯선 것에 도전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319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322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327


영원히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는 방법으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아니 인생을 살면서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연재도 이해받기를 포기했고, 관계에 대한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결국 지수를 만나 관계를 맺게 되고 지수와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해받기를 포기하는 방법보다,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보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는 방법보다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결국 연재도 사람에게 상처받기 싫어 관계를 포기했지만 콜리라는 존재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354


콜리는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투데이에게서 떨어진다. 이것은 소설이다. 그것도 SF, Science Fiction, 픽션, 즉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콜리가 떨어지는 순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연재와 지수가 로봇대회에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 또한 감동포인트고 작가도 마지막에 오픈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로봇이라는 존재는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우리 집에도 "지니야! TV 틀어줘"라고 하면 "네!"라는 대답과 함께 TV를 켜주는 '지니'가 있고, 운전을 할 때 "아리야, 가까운 주유소로 안내해줘"라고 하면 아리는 제일 가까운 주유소로 나를 안내해 준다. 사람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내 삶 가까이에 이미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해주는 로봇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로봇들이 결국 인간과 함께 살아가려면 점점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사람과 같이 느낄 수 있도록 진화되어야 하는 것은 순리인 것 같다. 그 안에서 인간은 만들어진 감정을 가지고 있는 로봇이라도 그 존재를 인간과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렇게 때문에 오류 때문에 밤새도록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다르파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연재처럼 말이다. 미래에 대한, 로봇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새로운 젊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오늘 나는 도서관을 찾아가 천선란의 소설을, 그리고 한국과학문학상을 받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한참 읽다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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