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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May 18. 2021

순서를 기다려

캐비닛_김연수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 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p.226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더 못한 존재는 호치키스 심이나, 진공청소기 속의 먼지 정도라고 보면 될까. 내가 그런 존재만큼으로 느껴질 때, 나는 다시 그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 진다.  내 존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가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다시 존재감을 만들어주면 되는 거니까.라고 나는 주먹을 꽉 쥐어보지만, 그(녀)에게 내 마음이 당도하기도 전에 이미 내 주먹은 힘을 잃어버리고 주먹을 쥐었던 두 손은 스르르 풀어져, 고작 마른세수를 한번 해보거나, 쓸데없이 눈을 비벼버리고 만다. 


해 질 무렵, 하늘이 주황색으로 변해갈 무렵, 그냥 마음이 이상해질 무렵. 전화도 안 받고 뭐해.라고 문자가 온다.  너무 반가웠는데, 정말 눈물이 날만큼 너의 문자가 기뻤는데, 저 밑에 나도 모르게 쌓이고 있었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살갑게 안부를 묻고, 시시한 휴가 얘기와 날씨 얘기로 시간만 흘리고 있을 뿐. 아주 작게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네가 아주 작게 나도.라고 말할까 봐. 


그건, 이런 거야. 

나와 같은 마음이면 겁이 나고,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면 속상한. 

바보 같지만. 

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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