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책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진 Jun 17. 2022

긴긴밤

루리 글/그림

"노든, 복수하지 말아요. 그냥 나랑 같이 살아요."
내 말에 노든은 소리 없이 울었다. 노든이 울어서 나도 눈물이 났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 바위 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104


나도 눈물이 났다. 나는 지금 상처투성이는 아니지만, 지치지도 않았지만, 엉망진창도 아니지만 눈물이 났다. 그건 내가 상처투성이었던 그때가, 너무 지쳐 엉망진창이었던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복수만 남은 노든처럼, 나도 온 세상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016


코끼리들과 노든, 윔보와 치쿠 그리고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소중한 사람들의 집합 같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들은 자신들과 다른 코뿔소 노든을 소중히 챙겨주었고, 외롭지 않게 보살펴주었다. 윔보와 치쿠도 자기가 낳은 알은 아니지만 소중한 생명을 끝까지 지켜주었고, 치쿠와 노든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마지막 생명을 놓치지 않았다. 노든과 이름 없는 펭귄도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함께 하고 안녕한다. 그리고 결국, 코뿔소 노든은 처음 코끼리 고아원의 코끼리들의 바람처럼 훌륭한 코뿔소가 되었다.




책에 있는 이들의 삶에 포기는 없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위한 처절한 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 내는 것.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이다.


세상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바쁘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나를 화나게 하는 일들이, 사람이, 상황이 자꾸 생겨난다. 그렇지만 내 삶을 내 방식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짧은 동화에서 배운다. 깨닫는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한 이 소설책은 내 손에 들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서점에 있는 책을 아무리 꼼꼼하게 브라우징 했다 해도 이 책을 집어 들지 않았을 거고, 아무리 실업계 고등학교라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 소설을 내가 수서 하진 않았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이 책은 더욱 소중하다. 나에게 올 리가 없었던 소설이라서.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116







매거진의 이전글 순서를 기다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