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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Sep 13. 2021

<아메리칸 뷰티> 권태라는 이름의 행복

얼마 전 개봉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은 어른들이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애니메이션의 메시지라하면, 현재에 소소한 행복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 그 행복이 반드시 일생의 거대한 업적과 꿈이 아니어도, 행복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 영화 <아메리칸 뷰티>는 픽사가 애니메이션으로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미국 중산층 가정을 빗대어 20년 전에 먼저 말한 영화이다. <소울>이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이 영화는 권태에 침몰된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레스터는 무기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남성이다. 아내와의 권태기는 이미 오래되었고, 하나뿐인 딸은 전형적인 사춘기의 양상을 넘어 아버지가 사라져버리기까지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래스터는 우연히 딸의 친구인 안젤라를 보고 욕정을 품게 되고 친구의 딸에게 품은 욕정은 그의 안에서 열정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딸의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웨이트운동을 하고, 자신을 해고하려는 상사와의 협상과 성공해 거액의 퇴직금을 미리 당겨 받는다. 잘나가는 부동산 대리인과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그의 부인 캐롤린. 딸의 친구에게 욕정을 품은 레스터. 앞 집에 이사 온 소년에게 관심이 생긴 그의 딸 제인. 동성애를 혐오하는 해병대 아버지 밑에서 마리화나를 밀매하며 돈을 벌고, 캠코더로 주변을 관찰하며 촬영하는 앞 집 소년 릭키. 그 들의 일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 들은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아메리칸 뷰티>는 앞서 말하였듯이 애니메이션 <소울>과 그 궤를 같이한다. 미국 중산층가족의 붕괴를 잘 표현하였다는 이 영화는, 사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더라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한 번쯤 느낄법한 삶의 권태에 대해 다뤘다. 영화는 초반부 극의 전개와는 다르게 꽤 교훈적인 메시지로 끝이 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교훈은 관객으로 하여금 거북함 없이 스며든다. 친구 딸에게 욕망을 품은 레스터와 불륜남과의 거침없는 스캔들을 일삼는 캐롤린 그리고 방황하는 안젤라를 보자면 이 가족은 금방이라도 파국으로 빠져들 것 같지만, 의외로 이들의 결말은 파국이 아닌 새로운 국면에 가깝다. 아마도 그 지점은, 되바라져 보였던 안젤라가 실은 낮은 자존감을 그저 이성의 관심으로 채우고자 허세를 부린 10대 소녀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레스터가 깨달아버린 때가 아닐까. 안젤라는 그의 욕망이 아닌 그저 욕망을 위한 도구였음을 그는 벗은 안젤라의 옷을 입혀주며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극 중 릭키는 바람에 속절없이 흩날리는 비닐봉지를 촬영한 것을 제인에게 보여준다. 그 비닐봉지를 함께 보고 있자니 바람에 그저 날리는 쓰레기가 아닌, 춤추는 한 명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인다. 릭키는 그 영상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다루는 듯하였고 제인 역시 홀린 듯 그 영상을 함께 바라본다. 더불어 관객 역시 속절없이 그 영상에 빠져들고 만다. 영화의 다소 충격적인 결말 이후 릭키가 촬영한 캠코더 영상 속에서 등장했던 비닐봉지가 실은 레스터였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관객은 없을 것이다. 레스터의 마지막 독백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회색도시에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전하는 따스한 조언일지도 모른다. 삶은 언제나 아름다웠노라. 꽤 많은 값을 치른 후에야 깨달은 그에 비하여 우리의 날들은 조금 더 남아있으니까.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화창한 날씨, 불어오는 송풍에 어쩌면 이것이 행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처럼 행복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옆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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