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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Sep 19. 2021

<희한한 위로> 자가치유적 글이 타인에게 치유가 될 때


나는 위로는 인생을 함께 고달파하는 동질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 절실히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면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그 앞에서 섣부른 조언과 어쭙잖은 위로를 하지 않기 위하여 나 스스로 입을 다물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나 역시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을 골라 내 처지를 토로하곤 했다. 그들은 대체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으며, 조언을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에세이를 고를 때에도 이 규칙은 고스란히 적용된다. 최근 들어 서점에서 흔히 보이는 '힐링 에세이'들 중, 감성적인 아주 짧은 글과 아날로그 필름 필터를 씌운 듯한 사진이 들어간 책들은 대체로 온도가 없었다. 마치 빅스비 혹은 시리에게 '나 힘들어'라고 말하면 대답할 만한 정도로 기계적이다. 그러한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애서가의 입장으로서 꽤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 정도의 얕은 위로에 현대인들이 감동을 받을 만큼 우리나라 사회는 얼마나 삭막한가. 혹은 그러한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 나 같은 무명작가들도 어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새로 만들어 그런 피드를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책 <희한한 위로>는 오랜 시간 라디오작가로 일했던 강세형 작가의 최근 에세이집이다. 그녀의 첫 책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를 20대 초반에 읽은 나는 '지금 내가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구절에 몹시나 감동을 받았는데, 사실 그 책을 보고 남몰래 울기도 했다. 친구들은 한창 대학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홀로 어른의 세계에 빨려 들어간 나는 애늙은이를 자처하며 회색도시에 찌든 직장인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그 때의 작가와 비슷한 나이가 돼버린 나는 오히려 이 책의 제목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어른과는 거리가 먼 '어른 아이'였고, 지금의 나는 이제는 정말 아이의 탈을 벗어던지고 어른의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책의 제목은 어른이고 싶지 않은 아이가 아닌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희한한 위로>는 그 시기를 겪고 중년으로 도래한 작가가 자신이 걸핏하면 아픈 이유는 정신력의 문제가 아닌 희귀병에서 온 것임을 깨달으면서 시작한다. 그녀처럼 꽤 허약한 체질인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아프면 정신력이 약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살아왔다. 사실 나의 정신력에는 문제가 없음을 이제는 알지만 어릴 땐 그 말을 사실인 양 믿으며 살았다. 이제는 되려 정신이 허약해지지 않도록 매일 1시간씩 실내 자전거를 타려 노력한다. <희한한 위로>를 다 읽고 나면 정말이지 희한하게 위로가 된다. 이 책은 작가가 본인 스스로를 위하여 쓴 글들임이 여실히 티가 나지만 되려 그 1인칭 시점이 위로가 된다. 그녀의 글들은 스스로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나의 어깨가 두드려지는 듯하다. 더군다나 저번 브런치북 공모전에서 이슬아작가가 '자가치유적인 글들'을 심사에서 제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가치유적인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이보다 더 한 위로가 없다.


작가가 자신의 바람대로 그의 책이 희한하게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떨까. 그리고 나의 글 역시 누군가에게 그러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 보아도 강세형작가는 제목을 참 잘 짓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30대가 된 기념으로, 다시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를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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