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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07. 2021

<여행의 이유> 여행의 이유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날씨가 선선해지며 가을장마라고 하는 비가 내리는 이맘때, 나는 미친 듯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진다. 처음 배낭여행을 떠난 것이 11월임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에 찾아오는 방랑벽이 가을을 타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생각해보면 스무 살에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이래로 어김없이 일정 시기만 찾아오면 동네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누군가 이유를 물을 때면 무어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형형한 감정이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지난 여행의 명확한 동기들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불투명해져 갔다. 나의 여행의 이유는 그렇게 옅어져 갔으나, 옅어진 채로 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했다.


김영하작가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대한 여행기라기보다는,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이라는 행위에 대해 풀어놓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혹여 특정한 장소가 있고 그에 따른 감상이 적힌 에세이가 읽고 싶은 이라면 작가의 다른 작품인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자. <여행의 이유>는 작가의 생애 걸친 모든 여행에 대한 회고록이자, 그 여행 중에 떠오른 단상들에 대한 묶음과도 같다. 더불어 이 책의 분량은 매우 짧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완독 하는 속도가 더디게 흘렀다. 작가의 문장이 읽히지 않았다기보다는(그럴 작가도 아니거니와) 이 책에 수록된 짧은 단편들이 꽤 한 편 한 편씩 여운을 남게 했다. 그러니 책이 더디게 읽혔다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음미하며 읽게 만드는 책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나처럼 시종 방랑벽이 든 사람처럼 어느 시기만 되면 여행을 주기적으로 가 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느덧 그 여행이 자신에게는 습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과식한 날은 운동을 하듯이 그런 삶의 루트가 이들에게는 그저 여행인 것이다. 그 루트에 어떤 특별한 동기가 없듯, 삶에서 여행은 어느덧 자연히 따라오는 수순이 되어 그저 그 행위가 목적이 된다. 그러니 여행에서 얻는 것이 뭐냐는 꽤 근본적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이다. <여행의 이유>는 그런 이들이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들을 수려한 글솜씨를 가진 이가 대신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더불어 글 쓰는 사람이 갖는 여행에서의 의미와 언어에 대해 나 역시 글 쓰는 이로서 꽤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직전 장강명작가의 <책, 이게 뭐라고>를 읽었었는데, 두 작가의 건조한 문체가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두 작가의 특징을 나눠보자면 김영하 작가의 온도가 좀 더 미온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온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때 여행은 반드시 뜨거워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두근두근거리며, 어떤 모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묘한 흥분을 주는 어떤 것이라고. 그렇게 몇 번의 여행을 거치고 이제는 타의적으로 쉽게 어딘가로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일상을 벗어나는 모든 것이 여행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 같은 여행이 그립기도 하지만, 내 삶의 궤도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모든 장소가 여행지가 되기를 바라본다. 얼음 한 두어 개를 넣어 바로 마실 수 있는 미지근한 차가 어느 날은 필요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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