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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r 14. 2019

[D+31] 직업에 대하여

4년 차 도서관 사서가 0년 차 주방 막내가 되다.

인생은 도무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치 악의 소굴처럼 느껴졌던 낯선 도시도 어느덧 친숙해지고, 세상 밖으로 혼자 떠밀려나가는 듯한 두려움도 무색해질 만큼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그리고 무려 3달이나 예상하였던 나의 구직활동은 다소 허무할 만큼 한순간에 해결되었는데, 그 과정을 복기하여보니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급작스레 해결된 나의 구직 과정은 이러했다. 한국에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무려 3개월 동안 베짱이 생활을 영위한 나는 낯선 이 곳에서 노동하지 않는 삶이 조금은 무료해졌다. 이러려고 호주에 온 것인가 싶을 정도로 도무지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호기롭게 오지잡으로만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선뜻 자신이 서지 않았다. 검트리에 올라온 구인공고는 죄다 경력직을 요할 뿐이었고, 호주나라에서 구미가 당기는 공고들은 모두 '사무보조'일뿐이었다.(그마저도 영어가 능통하지 않아 탈락했을 테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서로 일했던 것이 뭐라고 선뜻 새로운 일에 도전할 자신이 없었고, 그런 연유로 데이터 입력 아르바이트 등의 유사 사무직만을 지원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처음 면세점에서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에 '면세점'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서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도무지 서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마음가짐으로 면접을 보았으니 붙을 리 만무했고 설령 간절해 보였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사서 경력은 오히려 이곳에서는 독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서'가 주는 다소 정적인 이미지(물론 근무지에 따라 다름에도 불구하고)가 오히려 못 미더운 이미지를 심어주는 기분이었달까. 게다가 면세점 팀장님께서 '도서관에서 책 빌려주고 그런 일하셨겠네요.'라는 말을 듣고 울컥한 나는 그 자리에서 욱한 나머지 그게 전부가 아니라며 항변한 것이다.

퀸 빅토리아 빌딩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 (UNSW Sydney)
세인트 메리 대성당 (St Mary's Cathedral)

그렇게 이대로 호주에서 백수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과 영어는 고작 회화 정도 하는 내가 언감생심 사무직을 꿈꾸었구나라며 차디찬 현실을 직시하던 중,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평소에는 엄두도 안 나던 일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당장 다음날에 나와보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나는 그곳이 무슨 자리인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그렇게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것이다. 하루 6시간이라는 다소 짧은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개복치에 가까운 저질체력이었던 나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뻗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나름 듬직한 체격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내가 이곳에 와서 제대로 끼니를 못 챙겨 먹어서인지는 몰라도 눈에 띄게 말라 보였고, 실제로 모든 주방기구들은 나에게 크거나 무거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말하자면 냉장고 문을 열 때조차 힘겹게 열곤 하여 사모님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일하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좋은 사람들과 다시 신입으로 돌아간 듯한 설렘 때문이었다. 사장님을 비롯하여 가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좋았고, 사실 여전히 내가 무엇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드는지라 배우는 것이 새로웠다. 물론 사서라는 직업이 종종 사무치게 그립고, 가끔은 도서관으로 도망치고 싶다가도 직업에 있어 하나의 보기를 고려해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냐며 말하겠지만, 한국에서 사서로 5년 차에 접어드는 내가 갑작스레 그 일을 그만두고 냅다 새로운 일에 뛰어들 리가 만무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햇병아리 같은 이 기분에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업은 언제나 애증이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레기 마련이며, 중간에 찾아오는 권태기에 치를 떨다가도 누군가 단점을 말하면 나도 모르게 '그건 아니야'라고 감싸 안기 마련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 직종에 대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짝이는 누군가를 볼 때면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를 저절로 떠올리게 되고 사실은 이 직업에 대해 좋은 점을 말해주기에 앞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힘들 텐데'가 먼저 튀어나온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정말 하고 싶어?'를 물어보며 나 역시 이대로 괜찮은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스갯스러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방보조로 일하며 내가 사서로 일하던 그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에 대하여 깨닫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다시 배운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재미를 느낀다. 비록 매니큐어 하나 못 바르고 피 멍에 손톱이 깨지며 향수보다는 튀김 냄새가 더욱 친숙할지라도, 사무실 한편에 앉아 결혼자금을 모으며 날씨가 좋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던 그 시절에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이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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