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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26. 2021

<완다비전> 완다의 아름답고 처연한 슬픈 언약식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인하여 부모를 잃었고 하나 남은 사랑하는 쌍둥이 오빠마저 죽었다. 새롭게 가족이 될 수도 있을 이들을 만났지만 서로 간의 이념과 사상이 달라 찢어져야 했고, 세상에 그토록 혼자 버려질 때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내 편은 다행히 내 옆에 있었다. 그렇게 나에겐 전부였던 사랑하는 이가 눈앞에서 두 번이나 목숨을 거뒀다. 한 번은 나의 손으로, 또 한 번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이마가 뜯긴 채로 사망한 나의 연인을 앞에 두고 세월은 무참히 흘렀고, 돌아왔을 때엔 그의 시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가 다시 살아 돌아와 내 곁에 있다. 우리는 누구보다 평범한 가족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이곳 나의 세상에서는.

디즈니플러스에서 MCU의 첫 드라마시리즈의 주연으로 완다를 내세웠다. 기존 마블영화의 장르와 다르게 <완다 비전>은 서사에 중점이 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완다의 인생이 작중에서 매우 기구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모두 사고로 잃고 사랑하는 연인마저 잃었지만 그는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만으로 팔다리와 몸통이 잘린 채 분해되어 연구되고 있었다. 심지어 타노스의 핑거스냅을 막고자 자신의 손으로 마인드스톤을 파괴하며 비전을 죽였지만, 타노스가 시간을 되돌려 다시 살아내어 무참히 그의 이마에서 스톤이 뜯겨나가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물론 MCU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기구한 사연을 지녔다고는 하나, 완다는 뭐랄까 조금 더 애처로운 감정을 들게 만든다. 그녀 곁에 가족이자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단 한 명의 존재인 비전을 잃어서이기 때문일까.


MCU작품들이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면 재미있을 요소들이 대사에 더러 있었지만, <완다 비전>은 그보다 더욱 앞서가 미국인들을 위한 시트콤 헌정 드라마에 더욱 가깝다. 완다가 어릴 적 부모님을 통해 미국시트콤 팬이 된 점을 이용하여, 그녀가 만든 가상의 공간인 헥스는 시트콤으로 구성되어 브로드캐스트로 방출된다. 시즌의 중반까지 가다 보면 미국의 고전시트콤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프렌즈>를 비롯한 2000년대 시트콤에 익숙한 이라면 문화적 거리감을 현저히 좁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드라마 <완다 비전>은 장르를 달리하여 새로운 국면에 맞는다.


이후 원작에서는 완다의 스승이자 꽤 많은 작품에 등장한 아그네스를 마치 인어공주의 우슬라와도 같이 등장시켜 베우의 기량을 맘껏 뽐내게 하였다. 극 중 아그네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자신이 행한 악행들을 하나의 뮤지컬넘버로 풀어내는데 그 시퀀스는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과도 같이 보인다. 또한 엑스맨 시리즈에서 퀵실버를 연기한 배우를 재등장시켜 앞서 나올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과 같이 소니와의 협력이 작 중 직접적으로 돋보이게 하였다. 소니로 떨어져 나간 마블의 일부를 MCU에서 자신들의 세계 속으로 서서히 흡수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처럼 완다의 히어로적 서사를 공고히 쌓아둠과 동시에 그녀가 가진 상처에 관하여 드라마 <완다 비전>은 누구보다 영리한 방법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보인다. 인위적으로 정부에서 재탄생시킨 기억을 잃은 비전과 완다의 헥스 속에서 존재하는 비전이 대치하여 '테세우스의 배'를 인용하여 철학적인 타협을 맺는 과정은 마치 울트론과 비전의 과거 대치 장면을 보는 듯하다. 어쩌면 많은 마블팬들이 기대했던 <블랙위도우>도 이와 같은 방식을 취했더라면, 초대 어벤져스의 멤버의 예우가 이토록 형편이 없었다는 의견이 나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완다 비전>은 작품 곳곳 숨겨진 의미가 많은 만큼 미술적으로도 꽤 많이 공이 들어간 작품이다. 완다의 환상 속은 그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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