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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Jan 05. 2022

2015.11.29~12.3 / 피렌체행 야간열차

Firenze, Italia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영향인 탓인지, 나는 유럽을 가기 전부터 야간열차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어둡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기차의 엔진 소리를 들으며 피렌체로 건너가는 여정. 밤을 새워서 10시간이 넘도록 열차를 타야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육체노동은 배제한 채, 나는 오로지 야간열차라는 로맨틱함에 빠져 꼭 한번 즈음해보아야 할 경험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경험은 마치 나의 기대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시 해보지 못할 특별하고도 소중한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맘 편하게 몸을 필수도, 잠 한 순 자지 못하고 내내 선잠을 자야 했던 고된 중노동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을 만큼.


난생처음 타보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기차에 오른 나는 운이 좋게도 객실을 바꾸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들어간 객실에서는 중동에서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과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선생님을 mother라고 부르는 아이들 탓에 나는 속으로 '저 아이들 모두?'라며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학교도서관 사서로 근무한 이력이 있던 나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나오면 괜스레 친한 척을 하고 싶어 했는데, 그 덕에 객실의 선생님과도 몇 마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 때마다 주의를 주는 선생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렘을 감출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두 번째 칸에서는 각각 루마니아와 프랑스에서 온 셰프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셰프님과 그의 아내의 연애사는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가 아닐 수 없었는데, 페이스북으로 서로 알게 된 그 둘은 메신저로 사랑을 키워 나갔고, 급기야는 그가 그녀에게 루마니아로 오라며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어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페이스북으로 호감을 이어간 것도, 직접 만나게 되어 그 호감이 연애로 발전한 것도 모두가 대단하게 들렸는데,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 하며 신기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앞서 말한 재미난 경험과는 별개로 야간열차는 사실 곤욕에 가까웠다. 좁고 서늘한 객실 안에서 외투를 베개 삼아 창가에 기대어 쪽잠을 자는 그 시간들은 흡사 실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과 비슷할 것이란 내 예상과는 달리 기차에 비해 비행기는 천국에 가까웠다. 차가운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려 노력할 때마다 기차는 움직였고 다리 하나도 온전히 쭉 뻗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 몸은 갈수록 좀이 쑤셔왔다. 털어놓자면, 야간열차에서 쪽잠을 자던 그 순간만큼은 '굳이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추억들은 내 생애 잊지 못할 여행길이 되었지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
리퍼블리카 광장 (Piazza della Repubblica)
산 로렌초 성당 (Basilica di San Lorenzo)

고된 기찻길이 끝나고 드디어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쌀쌀하고도 차가운 새벽 공기와 더불어 아직 주변이 어두운 탓에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한 피렌체와는 사뭇 다른 첫인상이었던지라 맞게 도착한 것인지조차 의뭉스러웠다. 우스갯소리로 앞서가는 사람들을 쫓아 드디어 익숙한 맥도날드를 발견하자 나도 모르게 어찌 되었건 시내에 왔다는 사실에 안심하였다. 피렌체까지 와서 고작 맥도날드에 마음이 놓이다니. 따듯한 카페라테 한 잔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역 밖으로 나와 가이드북에서 익숙히 봐온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처음 마주하자, 나는 비로소 내가 피렌체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사실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벽면에 그려진 그림 덕인지 그 하나 자체로 미술작품과도 같았고, 산 로렌초 성당은 폭신한 파운드케이크를 연상시킬 만큼 그 외형이 꽤 단출하였다. 마치 벨기에와 오스트리아에서 본 건축물들이 동화 속 같았다면 피렌체의 성당들은 그림 속 한복판에 들어온 기분이었달까.

그러나 피렌체를 여행하며 인상 깊었던 장소 두 곳을 뽑아보라면나는 두오모 성당과 바로 사진으로 보이는 이 작은 서점을 떠올릴 것이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렸던 이곳은 동화책과 헌 책원서도 함께 취급하는 조그만 규모의 서점이었다서점이라면 그곳이 어디던 늘 발길을 멈추고 서성이게 되는 나는 피렌체에서는 서점에 직접 들어가 구경해보는 여유를 누렸는데그곳에서 느낄 수 있던 따듯한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동화책들에 한껏 마음이 빼앗겼낯선 도시에서 낯선 언어로 가득한 책들에 둘러싸인 그 순간나는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책 속에 파묻혀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피렌체에서는 그곳에 사는 생활자처럼 여유를 부리며 느긋하게 여행하였는데 나의 유럽 여행은 이처럼 후반에 갈수록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는 여행이 주를 이루었아침 8시에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 출근을 하듯 나와 7시에 퇴근하듯이 숙소로 돌아왔던 런던과는 다르게, 그 후의 여행들은 여유를 부려야 오로지 그 도시를 다 이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전에는 맥주 한 캔을 기울이고 느긋하게 일어나 그 주변에 유명한 것들을 몇 군데 둘러보는 여행. 어느덧 나는 유명한 관광지보다도 일상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에 줄곧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종종 그리운 피렌체의 전경을 떠올려보면 특별할 거 없는 골목길들이 떠오른다. 무심히 올려진 과일 박스들 사이로 난 좁은 길과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골목들,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다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그곳만의 풍경들. 심심치 않게 보이는 가죽 공방들과 이태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다소 심심한 파스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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