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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Jan 18. 2022

2015.12.1~12.3 / 냉정과 열정 사이

Firenze, Italia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즈음되었을 때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서로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지인은 함께 바리스타 학원에 다니던 H언니였는데, 언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및 구두 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엔 각자 맞닥드려야 하는 해외생활에 대한 걱정을 잠재우며 커피를 함께 배우고 있었다. 그 당시 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주저 없이 '냉정과 열정 사이'로 말하였는데 같은 영화를 10번이나 볼 정도로 그 작품을 사랑하며, 그것도 모자라 피렌체까지 직접 방문하여 영화의 주요 촬영지였던 두오모성당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다고 했다. 언니는 성당 꼭대기에 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말하던 그 순간에도 언니는 퍽 행복해 보였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

나 역시 유럽여행에서 언니를 울게 만들었던 두오모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피렌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오모 성당을 처음 본 순간, 나는 한눈에 다 담기지도 못하는 거대한 성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피렌체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두오모성당은 마치 피렌체를 수호하는 하나의 상징물처럼 보였다. 실제로 나는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시내 어디를 지나가던 두오모성당을 고개만 들면 시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경이로움도 잠시 유럽의 풍경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했진 터라 그러한 광경에 점점 감흥을 잃고 있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어느 순간 우리 집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교와도 같았다. 그즈음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하여 안일해져가고 있었다.

여행 막바지에 다다라서 얻은 권태감이 바람과 같이 사라진 것은 미켈란젤로 언덕을 올라간 순간이었다. 40일가량 되는 장기여행에 피로가 누적된 탓에 막상 관광에 소홀해진 나는 더 늦기 전에 피렌체의 주요 관광지는 다 돌아보리라는 마음으로 가이드북을 양손에 쥔 채 유명 명소를 찾아다녔다. 직장인과 같이 꼬박 8시간을 걸어 다녔던 런던여행과 차이점이 있었다면 이곳은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 하나를 골라 그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올라가는 입구가 생각보다 단출하여 기대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 언덕에 다다르자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잿빛으로 물든 건물들과 그 위에 드리워진 노을, 그리고 멀리서도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두오모성당을 보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잠시 잊고 있던 여행의 설렘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미켈란젤로 광장/언덕 (Piazzale Michelangelo)

당시 H언니와의 통화가 끝난 직후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피렌체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재생시켜 볼 수 있을까. 언니가 저곳을 특별하게 추억하게 된 계기가 우연히 본 한 편의 영화였다면, 나는 내 추억을 영화 삼아 저곳을 다시 회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저곳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가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본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저 아름다운 두오모성당을 바라보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냉정일까, 열정일까.


두오모성당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조금씩 퇴색될지언정 자신의 위용을 언제나 내보이며 그 자리에 오롯이 서있을 것이다. 그랑플라스 광장은 여전히 사람들이 사랑하는 장소일 것이며, 로텐부르크에서 보았던 크리스마스 상점 역시 언제나 동화 같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보았던 눈부신 크리스마켓은 해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크고 아름다운 행사가 될 것이며, 앞서 열거한 것들 외에도 내가 유럽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추억하는 유럽에서 오로지 변할 것은 단 하나, 그 시절의 나와 그 시절의 감상일 이다.


어쩌면 인생은 끊임없는 냉정과 열정의 연속은 아닐까. 열정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 조금씩 냉정해질 것이며 냉정했던 모든 것들 역시 시간이 지나 열정적인 그 무언가로 조금은 변모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이라는 것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 그 기로에서 오로지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추억은 아닐까. 어쩌면 추억이란 이미 지나가버린 열정과 앞으로 맞닥뜨릴 냉정 사이에서 부유하고 마는 하나의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행은 돌이켜보면 열정이자 돌아와 보면 냉정인, 냉정과 열정 그 어딘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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