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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Feb 03. 2022

2015.12.5 / 다시 동전을 던진다면

Roma, Italia

장마철에 유럽을 찾은 나는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를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우중충한 하늘이 나를 반겼고때때로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아름다운 유럽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상쇄시키며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그렇게 유럽여행의 끝이 보일 즈음에 운 좋게도 나는 로마 시내 한가운데서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쬘 수 있었다마치 유럽에서 얻은 마지막 선물처럼.


호스텔에서 가벼운 아침을 때운 후, 지도를 펼친 채 홀로 로마 시내 관광에 나섰다. 이 날은 오랜만에 나 홀로 시내를 구경하던 날인지라 처음 런던에 도착한 날처럼 긴장이 되었다. 차이점을 찾자면 더 이상 구글맵에 과하게 의존하지 않는 것 정도였다. 유럽 여행을 시작할 즈음엔 마치 구글맵 세상에 갇힌 것 마냥 핸드폰화면에 의존하며 좀처럼 주위를 둘러볼 수 없었다. 오죽하면 목적지를 찾는 과정에서 오롯이 기억나는 것이 지도의 2D 화면이었을까. 약 한 달 이상을 유럽에서 머물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지도가 일러주는 방향 외에 다른 길로 찾아가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
Colonna della pace

알렉산드로 호스텔에서 콜로세움까지 향하는 길엔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호스텔에서 나와 대성전까지 가는 길목에는 중동아시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다양한 가게들과 기념품 가게가 있었고그 거리를 지나자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 눈에 띄었다. 40일 동안 유럽에서 머물며 거대하고 웅장한 종교 건물을 익히 보아온 나로서는 그 광경이 새롭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전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잠시 지도를 치운 나는 길을 건너 다양한 각도에서 성전을 한눈에 담고자 노력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엔 익숙한 공원이 눈에 띄었는데 우리동네의 왕릉을 떠오르게 할 만큼 낯이 익었다. 어느덧 노을이 조금씩 드리워져 있었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며, 콜로세움을 목적지로 걷고 있는 이 길이 제대로 된 경로인지 의심스러웠다. 유럽의 거대한 관광지들은 미디어 속에서 존재하는 성지와도 같이 느껴졌는데, 그 주위를 유유히 배회하는 사람들을 보니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토록 평범해 보이는 공원 뒤로는 영화에서만 보았던 웅장한 콜로세움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공원을 통과한 뒤 카페가 즐비한 언덕배기를 내려가자 영화에서만 보았던 거대한 콜로세움이 눈앞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날은 화창하였고, 콜로세움 앞에서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있었으며, 공사 중인지라 일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내가 콜로세움 앞에 서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는 모든 관광지를 둘러보아 더 이상 새로운 감흥은 느껴지지 못할 것이란 나의 자만에도 불구하고, 콜로세움은 또다시 내가 유럽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나는 이 벅찬 감정을 홀로 느끼기 아까운 나머지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따사로운 햇살 밑에서 콜로세움을 등지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냈고, 만족스럽다고 느낄 때까지 연신 사진을 찍어댄 뒤 콜로세움 안으로 입성하였다.

콜로세움 (Colosseo)

관광객들과 함께 줄지어 내부로 들어가자,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콜로세움은 그 층마다 보는 높이가 달랐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가 내부를 올려다보자 그 위용에 도무지 넋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극에서만 보아온 그 콜로세움 안에 내가 들어와 있을 줄이야.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유흥에 목숨을 잃고, 또 흥겨워했을 무섭고도 아름다운 곳. 그곳의 잔인한 유흥은 어느덧 시간이 지나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꼿꼿이 존재했다. 비록 세월의 흔적으로 인하여 곳곳이 망가졌을지라도. 나는 콜로세움 안에서 기어코 한 바퀴를 모조리 돌아본 후에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o di Costantino)

구글 지도에 의지했던 나는 콜로세움에서 나와 개선문을 지난 뒤 포로 로마노를 찾기 위하여 한참을 헤맸는데 그 과정에서 산 중턱과도 같은 언덕을 두 번가량 오르내려야만 했다결국 개선문을 포함하여 서너 차례 언덕을 오르락 내린 뒤 찾기를 포기하곤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는 길 도중에 그토록 원하던 포로 로마노의 정문을 발견하였다. 정문 앞에는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하여 그 앞에 지키고 선 직원의 불편한 심기가 느껴졌고, 그 덕에 나는 질문할 기회만 간신히 엿보다 이윽고 운영시간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 결국 오늘은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은 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로마에서 머무는 동안 피사와 바티칸을 다녀올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그 유명한 진실의 입도 보지 못한 채 꽤 많은 관광지들을 놓치고 와야만 했다. 사실 조금 더 무리해서 둘러본다면 모두 다 보았을 예정이었지만 더 이상 나의 유럽여행을 과도한 일정으로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덕에 콜로세움 앞에서 꽃들이 만연하게 핀 정원을 등지고 앉아 유럽에서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을 맞을 수 있었고, 언제 다시 찾을지 모르는 콜로세움 안에서 빙 돌아 걸어보며 한 눈으로 다 담기 힘든 경기장의 자태를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다.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그날 저녁 나는 트레비 분수로 향하는 길에 어김없이 토마토 파스타를 시켜 먹은 뒤 어두운 밤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분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분수 안에 놓인 해신 넵투스상은 마치 넓은 바다를 아우르는 것만 같았고, 그 덕에 분수가 더욱 거대해 보였으며 그 앞에서는 유독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트레비 분수에서는 동전을 1번 던지면 다시 로마로, 2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원이, 3번 던지면 힘든 일이 해결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당시에 그 속설에 대해 몰랐던 나는 동전을 한 번만 던진 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그 속설에 대해 알았더라면, 나는 과연 몇 개의 동전을 던졌을까. 혹여 지금 당장 다시 트레비 분수로 갈 수 있다면 나는 몇 개의 동전을 던지고 돌아올까. 여행에서 돌아온 뒤 3년이 지나 뒤늦은 여행기를 쓰던 당시에는 트레비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한 번만 던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달빛에 그토록 아름답던 트레비 분수 앞에 다시 설 수 있다면 그 다른 소원들이 무색하게 느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쩌면 그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닥쳐올 힘든 일 역시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그 희망 하나가 많은 이들이 유럽으로 향하게 만드는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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