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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Feb 18. 2022

2015.12.5 / 굿바이 유럽

Italia, Vatican City&Roma

장기여행이 끝이 보일 즈음 서구식 건축양식이 더 이상 설레지 않기 시작했다. 낭만과도 같은 호스텔생활은 불편함이 쌓여 방랑자생활을 어서 청산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 권태감 속에서 선택된 마지막 관광지는 바로 영화 <천사와 악마>의 배경지인 바티칸시국이었다. 더 이상 유럽이 감흥을 주지 못할 거라 여겼던 그 시기에서도 바티칸 투어를 떠나던 그날만큼은 꽤 설레었다. 무교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성경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신비해 보였다. 살면서 성당은 관광지로 찾은 것이 전부인 나였지만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도취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유럽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싶던 나는 이른 시간에 바티칸으로 향했다. 바티칸 광장에서는 이미 성당으로 입장하려는 줄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조금이라도 서두른 내가 대견스러울 즈음 드디어 바티칸 성당에 입성하였다.

성 베드로 광장 (Piazza San Pietro)
성 베드로 대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 / 출처 : 위키백과 코리아

막상 성당 안에 입성하자 분위기에 압도되어 사진을 포기하고는 360도로 몸을 돌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관광객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는 유지되었고 성경에 관하여 일자무식인 나로서는 그곳이 바티칸 성당이라는 사실 하나에 도취되어 눈으로 담고자 애썼. 성당의 화려함은 위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고, 사람들을 따라 열심히 성당 안을 헤매다가 발견한 피에타는 비통함과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바티칸은 그야말로 성경에 무지한 사람이 유럽여행을 돌며 느끼는 아쉬움을 폭발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바티칸 시국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다 보냈던 탓에 저녁은 간단한 요깃거리로 때우고 돌아오는 밤길에 천사의 성을 마주했다. 거대한 천사상과 영롱히 빛나는 산탄젤로 성은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문처럼 느껴졌고, 그 전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흑사병의 종말을 알린 대천사 미카엘의 환시를 보고 만들어졌다는 역사와는 다르게, 당장이라도 살면서 저지른 고백을 소상히 밝혀야만 할 것 같은 위압감이 들었다.


외삼촌내외께서 가톨릭신자이신지라 바티칸을 간다고 하였을 때부터 꼭 축도된 목주를 사 와달라 부탁하셨는데 이 과정에서는 약간의 해프닝이 발생했다. 뼛속까지 종교에 무지했던 나는 그 '축도'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기념풉샵 직원에게 이것이 축도된 묵주인지를 물었고, 직원은 우선 구입한 후 축도는 다음에 받아야 한다며 안내하였다. 나는 축도라는 것이 어떤 증표나 문서라고 생각했을 만큼 무식했던지라 그 축도를 찾아 한참을 헤매었고, 다행히도 한 신부님을 만나 간신히 묵주에 축도를 받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축도는 신부님이 묵주에 축복 기도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찾은 신부님께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교황님이 오시는 날인데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며, 괜찮다면 본인이 기도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으셨고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신부님에게 축도를 받아보게 되었다. 그것도 심지어 로마 바티칸 대성당에서.

로마에서의 마지막 관광이 끝난 후 호스텔 체크아웃 후 짐을 맡기곤 마지막으로 로마 시내를 둘러보았다. 밤에 출국하는지라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고, 마지막인 만큼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정차 없이 걸어보기로 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반결한 오솔길을 올라가 보니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언덕 위에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고 밑으로는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 당시 나는 배터리를 절약하기 위해 위치 기능을 꺼두었던지라 후에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끝내 찾지 못하였는데, 언덕에서 내려와 잠시 쉬어갔던 카페를 검색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 건축물의 이름은 찾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퍽 속상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여행이 주는 낭만라 믿는다. 그렇게 길 가다 마주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 그림일기를 그리며 오후를 보내는 호사를 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의 선물을 고르지 못한 나는 호스텔로 가는 와중에서 발견한 광장에서 이모들의 취향을 저격할 스카프를 골랐다. 내가 고른 것들은 특이하게도 양쪽에 자석이 있어서 목걸이처럼 스카프를 채우는 독특한 모양새였다. 좌판 주인은 나에게 자신이 손수 만든 것이라며 설명해주었고 그 말에 혹한 나는 화려한 스카프의 자태에 홀려 그 자리에서 4개나 구입해버렸다. 그렇게 마지막 여행길에 알차게 선물까지 챙긴 나는 호스텔로 돌아와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고, 너무도 사람이 없어 스산했던 피오미치 공항에서 샌드위치를 요기로 때우다 이윽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럽여행은 나에게 있어 일탈이었다. 삶의 정해진 궤도 안에서 한 단계씩 평범해지는 과정을 밟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일상의 중도하차를 결심하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남들은 청춘이라고 불리는 20대 초반을 사무실 안에서만 보낼 수 없다고 다짐하던 나는 그렇게 1년간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선포했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8할은 노령의 배우들의 힘겨운 배낭여행기 <꽃보다 할배>였으므로 유럽은 내게 현실을 도피하게 할 비상구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인생에서 만나기 힘든 유형 군의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호주로까지 발 길을 돌렸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8할은 그 시기에 구성되었.


유럽여행은 그 후 호주에서 간간이 유러피안을 만날 때마다 대화거리로 요긴하게 사용하는 주제가 되었다. 수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빅벤을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하심장이 두근거리는 데다가,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당시 보았던 오스트리아 빈 시청의 영롱한 자태가 눈에 아른거린다. 어쩌면 호주로 가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에 첫발을 들인 사람의 자만심과 당찬 포부 때문이었으리라. 그저 여행일 뿐이라고 치부하였던 당시의 추억들은 삶의 곳곳에 녹아들어 현실에 가라앉을 때마다 나를 들어 올렸다. 비록 40일간의 추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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