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직장인 2년 차에 접어든 B씨는 최근 들어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스스로 자원하여 들어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도한 프로젝트에 점점 확신을 잃어갔고, 존경하리 마지않던 사수는 퇴직 후 좋지 못한 평판이 들려온다. 지금 나와 함께 업무를 나누어 맡은 이 팀원 역시 믿을만한 동료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시작한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히어로무비를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울 영화 <더 배트맨>이 최근 개봉하였다. <더 배트맨>은 배트맨이 이제 막 고담시의 자경단 역할을 맡은 2년 차에 벌어지는 연쇄살인극을 다룬 이야기로써, <다크나이트 3부작>이 아닌 영화 <조커>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유튜브 채널에서 위 영화는 <조커>에 대한 배트맨의 부름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이 영화는 필히 그의 말처럼 <조커>의 성공 이후 DCEU(DC 확장 유니버스)에서 독립된 새로운 서사의 연결이자, 또 다른 시작이라 볼 수 있겠다. (HBO MAX에서는 위 영화에 등장한 펭귄, 캣우먼, 고든 경위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을 제작한다고 밝혔다.)
DC 상호의 유래가 자사의 인기시리즈인 <디텍티브 코믹스>인 것과 더불어 배트맨의 데뷔작이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인 것을 고려해본다면 영화 <더 배트맨>은 탐정영화라는 원작의 기원에 충실한 추리물일 것이다. 배트맨을 한 명의 슈퍼히어로 내지는 초인으로 다루며 액션 활극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무겁고 침체된 분위기가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 점은 마블과 대조되는 DC의 가장 큰 매력이자 차이점이다. 시종일관 안개가 걷히지 않을 것 같으며 범죄가 들끓고 공권력이 파괴된 고담시에서 그는 아직 어둠의 기사이기보다는 탐정이 더욱 어울려 보인다. 그러니까 <더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 어둠의 기사가 되기 전 탐정이던 때의 이야기이다.
<더 배트맨>은 앞서 배트맨의 기원이나 활약을 다룬 무수한 작품들과는 차별점을 두기 위하여 이제 막 자경단 활동을 시작한, 고든이 경위이던 때의 이야기를 영리하게 차용하였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고담시의 왕자역할을 스스로 분리하기 이전의 시점을 다룸으로써 영화 <더 배트맨>은 빌런보다는 배트맨에게 더욱 집중하는 영화를 만들어내었다.
더불어 극 중 브루스 웨인은아버지의 과거를 캐내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는 과정을 겪을 뿐 인간과 슈퍼히어로의 간극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배트맨이라는 역할은 그저 브루스 웨인의 복수를 위한 개인적인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더 배트맨>은 한 사람의 업이 개인을 넘어 사회로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그 업이라는 것이 배트슈트를 입어야만 완성되는 일의 차이라는 것 뿐.
더불어 이 영화가 호불호로 나뉘고 있는 지점인 '현실적인 빌런'에 관해선 느와르를 목적으로 둔 감독의 의도가 적절하게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에 비하여 꽤나 현실적인 배트맨이지만, 그렇기에 추리물이라는 원작의 정서가 최대한 잘 녹아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극 중 펭귄과의 카체이싱 시퀀스는 이 영화를 대표하는, 가장 잘 만들어진 장면일 것이다. 전복된 펭귄의 차를 향해 걸어가는 배트맨을 펭귄의 시선에서 마치 박쥐처럼 묘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압도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