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사서 유 May 16. 2019

[D+81] 그리움과 자유 사이

미치도록 그리우면서도 자유로운 것들에 대하여

나에게 있어 친오빠와 다름없던 데이브가 고국인 태국으로 돌아갔다. 데이브는 호주에서 만난 나의 첫 사수이자 어른으로서 좋아하고 따르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비자가 만료되어 호주 라이프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기약 없는 약속을 뒤로하고 그의 고국행을 축하해주면서, 문득 우리는 이 곳에서 모두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각자 돌아갈 나라가 있고 서로의 고향은 여행이 아니고서야 방문하기 힘든 사이. 그 사실로 하여금 그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러웠던 것이다.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도 있다'는 그 흔한 말이 호주에서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마음을 열고 정을 쌓는 일이 어렵지만 행복한 일인 데다,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국 살이에서는 꽤나 힘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정이 많아 문제라며 애정 어린 핀잔을 주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을 주는 사람이기에, 언제나 내게 이별은 어렵다.

데이브에게 선물로 준 그림

종종 외국에서 살다 보면 익숙한 것들을 그리워할 때가 더러 찾아온다.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누리던 모든 것들, 가족들, 친구들, 심지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이를테면 낯선 마트는 여전히 조미료 하나 사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카레도 이곳에서는 수십 가지의 종류가 있는 데다, 음식 솜씨마저 서툰 사람이라면 무언가를 새롭게 요리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보습크림이 동이 나 당장 바를 크림이 없을 때, 울워스(호주 대형마트)에서 발견한 'moisture cream'이라는 문구가 어찌나 반갑던지. 이어폰 고무마개 한쪽이 어디로 도망가 버리자 집에서 굴러다니던 것들이 떠올랐고, 이곳에서는 어찌 되었건 가난한 외지인 신세이기에 무엇 하나 쉽게 구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직장인이었던 나로서는 요즘 따라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 프로젝트 하나를 맡아도 결과는 늘 좋았던 데다가 업무의 90%가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사무직의 특성상, 사소한 실수들을 결재 직전에 짚고 넘어갈 수 있었기에 순간순간 내 실수가 드러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5년 차 사서'라는 그 타이틀에 내심 자부심이 있었던지 가끔씩 미치도록 답답하게 느껴졌던 도서관의 공기가 그리웠고, 신간도서 사이에서 풍겨오는 빳빳한 종이 냄새에 코 끝을 파묻고 싶었던 적도 더러 존재했다.


그러나 주방에서 일하는 지금, 난생처음 시도하는 이 일은 여전히 내게 버겁고 나의 사소한 실수들이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 것이 좀처럼 낯설다. 그런 일들이 잦아질수록 더욱더 의기소침하게 되고, 괜스레 자신감이 떨어져 그만 쪼그라든다. 오랜만에 신입으로 돌아간 그 기분에 설레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고된 육체노동이 여전히 내겐 버겁다. 적막하고 고요하여 평화롭기까지 했던 도서관의 책 냄새와 시종 바삐 움직여야 하는 주방의 기름 냄새는 장·단점이 너무도 확실하여 때때로 생동감에 설레다가도 더 이상은 한계라며 자포자기하고 싶은 것이다.

날 좋은 날 집 앞 공원

앞서 말한 것들이 익숙한 것들이 그리운 순간이라면, 그와 반대로 익숙한 것들에 해방되어 자유로운 순간들도 존재했다. 한국에 살며 자의로 타의로 규정짓던 것들 (이를테면 스물일곱 나이가 이제 더는 어린 나이가 아닌지라 자리도 잡아야 하고 결혼자금도 모으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들 등등)에 대해 자유로워진 데다 만 나이로 시작되는 이 외국에서 스물다섯이란 나이는 충분히 가능성을 지닌 나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승진을 위해, 이직을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상황들을 지켜보며 나는 시간을 n분의 1로 쪼개고 쪼개어 그 어떤 시간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서 시달렸던 터라 이 곳에 혼자 동떨어져 사니 이렇게 또 마음이 편하지 않을 리 없다. 고된 일이 끝나고 이른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 이따금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 편으로는 한국에서 누리지 못했던 저녁 있는 삶에 조금 더 늦장을 부리고 싶어 진달까.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 내 삶이 출국 전에 상상하던 그 삶과 얼마나 비슷한지. 이곳에서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호주여서 좋은 것인지 호주가 아닌 그 어느 나라였어도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지. 어느 것 하나 내가 이루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 들어 한국을 떠나서야 알 수 있는 그리움, 자유 등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삶보다 행복하냐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진로 고민은 평생을 해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던데 지금의 나 역시, 어쩌면 평생을 걸쳐 해온 그 진로 고민의 중간 어느 즈음에 위치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낯선 이 도시에서 그리움과 자유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D+69] 한국이 그리운 순간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