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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Sep 29. 2022

이들 사이엔 사서에 대한 오해가 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던 중 내 직업이 등장한 일에 대해

이슬아와 남궁인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각기 다른 성별로 태어나 한 명은 1인 출판사를 차려 창업한 30대 초반이며, 다른 한 명은 강남8학군에서 좋은 성적으로 좋은 학교를 졸업한 흔히 말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은 40대이다. 한 명은 전업작가이고 다른 한 명은 겸업작가라는 것 역시 이 둘을 구분 짓는 또 다른 차이점이다. 요약해보자면 한 명은 MZ세대가 절로 떠오르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기성세대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다. 한 명은 자신의 진로를 자신이 만들어간 셈이고, 다른 한 명은 정해진 진로를 성실하게 밟아간 이다. 그러나 이토록 다른 두 사람 사이엔 '글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다.


이슬아와 남궁인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법한 유명작가이다. 두 작가 모두 수필로 문학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도 이슬아는 자신의 글을 독자에게 직접 발송하는 메일링서비스가 대성공을 했고 남궁인은 글 쓰는 의사 중 가장 전업작가에 가까운 의사일 것이다. 책 말미에 이슬아의 서간문을 통해 보다 명확히 나오지만 좀 더 상대를 치열하게 탐구한 쪽은 이슬아에 가까웠고, 남궁인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이슬아의 편지에 진땀을 빼면서도 특유의 예의와 겸손으로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이슬아는 작가이자 의사로서의 남궁인을 통하여 인간 남궁인을 들여다보는 듯하였고, 남궁인은 이슬아를 통하여 남궁인을 돌아보는 듯하였다. 두 사람의 글에서 전업작가와 겸업작가의 견해차가 종종 드러나기도 같기도 했는데, 어쩌면 이는 생계전선으로 글을 쓰는 노동을 통해 대가를 얻는 이와 생계전선의 고단함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쓰는 이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이로서 남궁인에게 꽤 많은 공감이 갔는데, 그는 이미 내게 성공한 작가이기에 내가 그의 말에 공감한다는 것이 꽤 낯설게 다가왔다. 남궁인은 종종 의사 남궁인보다도 의사가 아니어도 글을 썼을 작가 남궁인에 대한 어떤 꿈이 남아있는 듯 보였는데 이 역시 그를 향한 나의 오해가 아닐지 짐짓 궁금해졌다.


이 들의 서간문 중간에 내 직업인 '사서'가 등장했다. 미디어에서 사서를 로맨스주인공의 직업으로 등장시키며 내 직업이 대중이 갖는 어떤 로맨틱한 이미지가 있음을 분명 실감했지만, 이처럼 두 작가의 서간문에 등장하니 감회가 조금 남달랐다. 두 사람의 서간문에 내 직업이 등장한 경위는 이렇다. 시작은 기록당해지는 작가의 연인에 대해서였다. 남궁인은 자신의 일기장에서 연인에게 당신이란 역사를 기록하는 지극한 사서가 되기를 희망한다며 적었었고, 이슬아는 그 일화를 보고 자신이 한 때 사서를 꿈꿨노라 밝혔다. 남궁인은 사랑을 기록하는 일은 폭발물 같지만 멈출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이슬아는 사랑을 기록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아무튼간에 러브레터에 제 직업을 대용해주신 덕에 사서에 대한 로맨틱한 오해가 한 겹 더 생긴 것 같아 감사하다는 말과 더불어 사서는 기록하는 이가 아닌 기록을 관리하는 이라며 해명하고 싶었다. 사실 이 것은 해명과 더불어 이를 핑계로 두 유명작가의 서간문에 끼고 픈 무명작가의 외침이다.


인생을 살면서 수도 없이 범하고 범해지는 오해를 이 둘처럼 글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까. 반대로 나처럼 오해입니다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편지를 보내는 이처럼, 닿을 수 없는 해명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이슬아와 남궁인은 결국 구어가 아닌 문어로서 서로의 오해를 풀게 되었을까. 그들의 글을 읽는 나는 그 들에게 갖고 있던 오해가 풀린 것만은 분명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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