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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11. 2022

영원한 한 명의 블랙팬서를 위한 마블만의 추도식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를 보고서

<블랙 팬서>를 연기한 체드윅 보스반은 대중들에겐 배역을 넘어 스크린 밖에서도 존재하는 블랙 팬서 그 자체였다. 체드윅 보스만이란 배우가 실제로 행해왔던 흑인 인권운동과 그 행보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왜 블랙 팬서의 적임자였는지를 알 수 있다. 최초의 MCU 내 단독주연을 맡은 흑인 슈퍼히어로이자, 그 들을 범아프리카주의를 토대로 하나의 뿌리로 묶어주었던 영화 <블랙 팬서>는 그렇게 실제 흑인들에게 영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일례로 몇몇 흑인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세레머니로 와칸다 인사법을 보였고, 미국 NBA 인디애나 페이서스 농구선수인 빅터 올라디포는 경기장을 방문한 채드윅 보스만을 향해서 블랙 팬서 가면을 쓰고 와칸다식으로 인사를 했다. 마치 실제 블랙 팬서를 만난 것처럼.


그런 그가 대중들에게 미처 인사할 틈 없이 안녕을 고했다. 케빈 파이기는 다행히도 그를 대체하여 다른 배우를 섭외하거나, 혹은 CG로 살려내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채드윅 보스만을 대체할 수 있는 블랙 팬서는 영화 안팎으로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그런 채드윅 보스만을 위한 헌정영화이자, 유일하게 마블만이 할 수 있는 예우이자 애도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라몬다와 슈리 앞에 아틀란티스 제국의 왕인 네이머가 등장한다. 예전의 와칸다처럼 비브라늄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영토에 비브라늄을 채취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네이머는 슈리와 천재 공학도인 리리 윌리엄스를 납치하여 와칸다와의 전쟁을 불사할지어도 자신들과의 동맹을 맺기를 희망한다. 바다의 신이자 절대자로 군림하는 네이머 앞에서 블랙 팬서를 잃은 와칸다의 운명은, 결국 유일한 왕가의 혈통인 슈리 앞에 주어진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실제로 체드윅 보스만의 죽음과 같이, 영화 속에서 원인불명의 병에 걸려 끝내 티찰라를 보내야만 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영면에 잠드는 과정을 그린 극의 초반 시퀀스로 티찰라의 장례식을 매우 장엄하고도 엄숙하게 그려내며 영화의 초반부를 압도한다. 화면 가득 크게 벽화로 그려진 티찰라의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 보고 있는 장례식이 채드윅을 위한 것인지 혹은 티찰라를 위한 것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티찰라는 곧 채드윅이기에 마치 영화는 자신들만의 화법으로 채드윅 보스만을 추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 영화의 전부이자, 메시지이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블랙 팬서 2)는 명확한 장점과 단점을 지닌다. 반드시 <블랙 팬서> 1편을 보고 와야만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으며 단순히 관람한 것을 넘어서 전작을 감명 깊게 봐야지만 본작에 대한 울림이 남달리 다가온다. 더군다나 전작인 <블랙 팬서>는 국내 관객에게는 꽤 호불호가 나뉘었던 작품이었는데, 애당초 미국 사회 내에서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국내 관객들은 쉽게 체감할 수 없음으로 이러한 개인이 가진 흑인에 대한 인지에 따라서 영화 시리즈 전체의 호불호가 작품 이전에 관객에게 선택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채드윅 보스만이라는 배우 개인에 대한 애정에 따라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어느 작품에 비해서도 가슴 깊이 남을 수도, 어느 누구에게는 매력 없는 주인공의 고군분투기로 보인다. 그러니까 영화 블랙 팬서 2는 결코 모든 관객에게 호감을 살 수 없다는 큰 페널티를 안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애당초 전작에서 사이드킥에 불과했던 슈리가 메인으로 등장함으로써 체감하는 전대 블랙 팬서의 존재감은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영화의 큰 단점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전대 블랙 팬서의 부재를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밖 관객들이 동일하게 겪음으로써 마치 양면의 거울처럼 장점과 단점을 고스란히 지닌다. 극 중 메인 빌런인 네이머의 경우에도 멕시코 문화를 MCU 내에 차용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화권을 소개했다는 점과 관련 문화권에 속한 이들에게는 쾌재를 부를 일이지만, 극의 서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는 단점을 야기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불분명하며 어느 순간 선인과 악인도 희미해지만 이는 다층적인 캐릭터에서 얻는 심리묘사가 아닌 그저 캐릭터를 촘촘하게 구성하지 않았다는 방증처럼 보인다.


마지막 결말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도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기존의 MCU 1세대를 그리워한 이들에게 더 이상 마블영화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작별인사처럼 보이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에 관한 기대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렇듯 장점과 단점이 명확히 하나의 면에서 그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지닌 영화 블랙 팬서 2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으나 누구에게는 열렬히 사랑받을 작품으로 보인다. 어쩌면 흑인 슈퍼히어로라는 정체성과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영화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분명한 지향점은, 티찰라를 연기한 채드윅 보스만을 위한 마블만이 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대중의 곁을 떠난 배우를 온전히 자신이 사랑한 배역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야말로, MCU만이 할 수 있는 고인을 위한 예우이자 애도이자, 추모일 것이다. 더불어 극 중 슈리는 사실 새로운 블랙 팬서라기보다도, 꾸역꾸역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남겨진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결말을 통하여 사실 슈리는 그저 블랙 팬서를 잠시 이행하고 그 유산을 지키는 과정에 놓인 인물일 뿐, 다음 세대가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슈리라는 캐릭터가 메인으로서의 위압감과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 역시 영화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떠나간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도하는 과정과, 남겨진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과정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휴먼 드라마로서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한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마블의 끝을 알리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마블이 오로지 마블만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과감하게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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