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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Nov 08. 2022

<변호사 쉬헐크> 여성은 알지만 리벤지 포르노는 모른다

여성히어로에게 닥친 시련이 꼭 그것이어야 했을까

일전에 (<토르: 러브 앤 썬더> 마블영화는 본래 오락영화였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가 별안간 디즈니에게 돈을 받은 사람이라는 악플이 달린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팬과 안티가 양분화되어 생기는 해프닝인 줄만 알았고 나는 마블에서 어떤 시리즈가 나오든 간에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할 줄 알았지만 그간 MCU 작품을 딱히 실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남들은 그토록 망작이라는 평이 많았던 <이터널스>와, 허술한 CG로 꽤 욕을 먹었던 <미즈마블>을 볼 때까지만 하더라도 MCU의 위기는 기우에 불과하다 여겼다. 고대하던 '쉬헐크'를 보기 전까진.


헐크인 브루스 배너의 친척동생이자 뉴욕의 평범한 변호사인 제니퍼 월터스는 불의의 사고로 브루스와 같은 헐크가 되고 만다. 헐크가 되어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브루스와는 다르게 젠(제니퍼)은 헐크로 변할지어도 자신의 자아를 잃지 않으며, 빠른 시간 내에 통제력을 길러 브루스의 걱정을 뒤로하고 자신의 생업인 법정에 복귀하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빌런으로 인해 전국민에게 자신이 헐크인 것을 알리고야 만다. 일명 '쉬헐크'라고 불리며 하루아침의 슈퍼히어로가 되었지만 평범했던 변호사로서의 삶을 잃기 싫은 제니퍼는 급기야 '변호사인 헐크'라는 특별한 정체성을 지닌 채 생업에 나선다.

출처 : 씨네21

<변호사 쉬헐크>는 MCU 페이즈4의 마지막 작품이자 7번째 드라마인 작품이며 MCU 내에서 처음으로 제4의 벽을 깬 시도가 돋보인 작품이다. 전체적으로는 매회 각기 다른 사연이 등장하는 법정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하루아침에 평범한 30대 여성이자 변호사인 주인공이 헐크로 분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콘 골자로 취하고 있으며, 때때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연애가 잘 안 풀리는 30대 싱글 직장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특징이 명확하지 않아 모두가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취향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그 어느 것 하나 만듦새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도 함께 지닌다. 법정드라마라고 하기에는 각본팀이 실제로 법정신을 능숙하게 쓸 작가가 없어 법정신이 축소되었다는 인터뷰기사가 있는 만큼 법정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며, 30대 직장여성의 삶을 보여주기에는 '이제 막 슈퍼히어로가 된'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이 일반적인 공감을 사기에는 어렵다.


다만 헐크인 나와 헐크가 아닌 나로 양분된 자아가 '헐크이기도 하면서 제니퍼이기도 한 나'로 변모해가는 주인공의 성장은 갖은 시련을 겪으며 무난하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극의 절정으로 치닫기 위해 사용된 제니퍼의 섹스비디오에 관해선 고개가 매우 갸우뚱해진다. 누구보다도 대사를 통하여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한 듯해 보였으나, 정작 중요한 순간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섹스비디오가 슈퍼히어로 서사에 약점으로 사용된다. 그것도 무려 리벤지 포르노가.


일전에 <캡틴 마블>에 대하여 꽤 비판적인 리뷰를 올린 바 있었다. 영화의 주제의식과 메시지는 극이 완결된 이후에 관객이 종국엔 알아차리는 것이지 일차원적으로 캐릭터가 작가의 아바타가 되어서 대사를 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임성한작가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괴랄한 레시피를 읊는다던가, 시청자에 대한 드라마작가의 생각을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드라마 <변호사 쉬헐크>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는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극 중 쉬헐크인 제니퍼가 분노를 잘 다스릴 줄 아는 것은 여성이 평소에 분노를 잘 다스릴 일이 많기 때문이며 쉬헐크가 된 장점으로 밤길이 무섭지 않다는 것에 대해 모든 여성들이 바라는 것이라는 대사를 통하여 노골적으로 이 드라마는 '여성'을 앞세운다. 그런 드라마에서, 리벤지 포르노가 단순히 극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니.

출처: 디즈니플러스 트위터(@DisneyPlus)

최근 과한 PC사상, 높은 진입장벽, 세대교체를 위해 나온 새로운 히어로들이 대중에게 크게 매력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MCU가 헐크의 뒤를 잇는다고 등장시킨 쉬헐크는 캐릭터 자체로는 배우가 가진 개성과 연기력 덕에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극을 진행시키는 방식에서는 시종 물음표를 남긴다. 처음으로 제4의 벽을 깬 결말을 보임으로써 나름의 차별성을 두려 했던 노력도, 마블의 기존 작품들에 비하여 진입장벽이 크지 않고 가볍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재기 발랄한 드라마임에는 확실하지만 분명한 노선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노선의 방향을 잘못 정한 탓일 것이다.


헐크와 오랜 숙적인 어보미네이션이 애매한 포지션에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퇴장했다는 것이, 극의 클라이맥스로 쉬헐크의 섹스비디오가 유출된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여성이기에 겪는 불합리함을 능력 있는 직업인인 조연의 대사를 통하여 시종 전달하고는 있지만 정작 극의 전체에 어울리지 못하니 그저 그 대사가 훈계로 들린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블랙위도우>가 어쩌면 MCU에서 가장 잘 만든 여성서사였다는 생각을 하니 지나간 작품도 다시 보아야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깨우친 것이 아쉽다. 쉬헐크의 시련은 꼭 그것이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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