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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Jan 22. 2023

<정이> 로보캅을 만들고 싶었던 연상호의 한계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테세우스의 배를 오랜 시간 보존하기 위하여 아테네인들은 낡은 판자를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시간이 갈수록 본래 지니고 있던 낡은 판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 이 경우에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릴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내용은 그리스신화의 역설인 '테세우스 배'에 관한 내용이다. 위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MCU드라마 <완다 비전>에서는 납득만한 대사로 인용하였지만, 영화 <정이>는 아쉽게도 물과 기름처럼 영화의 서사와 주제의식이 끝내 섞이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기존의 영화 <로보캅>과 <아일랜드> 그리고 <엑스 마키나>의 익숙한 서사들이 혼재되어있으나 그 이상의 의미는 찾지 못한다.

황폐해진 지구에서 더는 살 수 없던 인류는 셀터라는 새로운 터전을 우주에 만들었으나, 스스로 독립된 국가를 선포한 일부 셀터가 내전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번의 작전을 성공시킨 윤정이용병(김현주)은 그만 전투 중 식물인간이 되고, 35년이 흐른 뒤 군사 A.I개발 회사인 크로노이드는 그녀의 뇌를 복제하여 전투 A.I를 만들어내는 '정이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프로젝트에 진전이 없자 본사 측에서 윤정이의 뇌데이터를 이용하여 다른 용도의 A.I를 개발하고자 하고, 정이 프로젝트의 팀장이자 윤정이의 친딸인 윤서현(강수연)은 개발 중인 A.I 정이를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 <정이>는 장르의 특성상 국내에서 쉽게 시도된 적이 없는 SF영화라는 것, 故강수연배우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의 의의가 깊다. 무려 200억이 투입된 작품인 데다가 <부산행>과 <지옥>을 성공시킨 연상호감독의 연출·각본이라는 점에서 공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김현주배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데뷔작인 데다가, 극 중 A.I 정이는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은 김현주배우가 대중에게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역이었다. 영화 <정이>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쏟아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영화 <정이>는 A.I를 연기하는 김현주배우의 액션씬과 CG,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작품 외적으로의 의미 말고는 한계를 역력히 보이며 결말을 맞는다. 메인빌런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장인 성훈(류경수)은 후에 밝혀지는 반전을 고려하더라도 배우가 지닌 연기력이 되려 의심될 정도로 캐릭터가 시종 인위적인 데다가, 새롭게 상품개발부로 부임한 세연(엄지원) 역시 기능적으로 소모될 뿐임에도 과장된 연기를 선보인다. 두 배우가 원래 가진 연기력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애초에 캐릭터구축에 구멍이 있었음이 설득력 있다. A.I임에도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를 연기한 김현주배우와 시종 차분한 톤을 유지한 강수연배우만이 영화 속에서 내내 이질적으로 겉돌 뿐이다.

캐릭터를 둘째 치더라도 영화는 자신들이 던진 철학적인 질문을 채 수거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앞서 언급한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선행작품으로는 이미 <로보캅>이 일찍이 대중에게 선보여졌다. 심지어 정이가 반은 이미 로봇으로 변한 자신의 신체를 보며 경악하는 장면은 2014년에 개봉한 <로보캅>의 시퀀스가 그대로 연상될 정도이다. 복제인간이라는 소재가 다르긴 하다만 자유를 찾아 시설을 탈출한 서사는 <아일랜드>가 떠오르며, 인공지능으로 개발된 로봇이 자율성을 가지고 창조주를 파괴한다는 설정은 <엑스 마키나>가 떠오른다. 이처럼 연상되는 작품들이 많은 데다가 위 작품들은 자신만의 답을 내렸에도 <정이>는 그저 의구심만을 남다.


다른 작품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영화 <로보캅>만큼의 고뇌는 보였어야 했다. 윤정이의 죽음 직전의 기억을 지닌 탓에 자신이 인간인 알고 있던 A.I 정이가 자신의 신체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것을 납득한 과정이 분명 필요함에도 영화는 과정을 그저 건너뛰어 버린다. 이에 윤정이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기계의 몸을 가지고 탈출을 한들 진정한 자유를 찾았을까에 대한 찝찝함이 극이 막을 내린 뒤에도 가시지 않는다. 더불어 윤정이의 친딸인 윤서현(강수연)이 엄마의 뇌를 복제한 A.I인 정이를 마치 실제 자신의 친모인 윤정이처럼 여기며 탈출로써 진정한 자유를 찾으라는 것조차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윤정이의 뇌를 복제한 A.I 정이는 과연 윤정이일까, 아닐까라는 심오한 질문으로 출발할 수도 있었던 영화가 한낱 K신파를  JK필름표 영화처럼 변모해 버렸다. 영화의 소재와 주제의식이 좋았으나 이를 미처 풀어내지 못한 각본의 한계 탓일 것이다.


문득 영화 <정이>를 두고 한 가지 생각할 거리가 떠오른다. 한국에서 쉽게 시도되지 않은 장르를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조금은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것일까. 분명 시도는 좋았으나, 시도만 좋았다. 윤리과목을 100점 맞았다고 하여 그 사람 인문학적 소양이 높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 <정이>는 마치 주입식교육으로 인하여 성적은 좋게 나오나 이내 휘발돼버리는 지식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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