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서 유 Feb 03. 2023

<더 메뉴> 시가 난도질 당한 시인의 마음

영화계와 문학계의 공통점

화자의 마음은 이렇고 저렇다는 이유를 빼곡히 적다 보면 시가 적인 종이에는 형형색색의 글씨가 수놓아진다. 이 행에서는 이러한 의도를 품고 있다는 말은 사실 시를 쓴 시인만이 알 테지만, 정작 그 누구도 진정 시인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이 없다. 홀린 듯이 받아 적은 화자의 마음이 적힌 시들은 그렇게 죽은 예술이 된다. 시는 분명 난도질당했으나, 이 사실을 아는 바 없다. 오로지 시를 적은 시인 외에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꽤나 좋아하였던 나는 국어시간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국어는 분명 좋아하는 과목이었으나 한 때 시 공모전에 줄곧 작품을 응모했던 청소년 시인 꿈나무인 나로서는 교과서의 시는 분명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선생님의 입을 통해 들은 시인의 마음들을 빼곡히 받아 적고 나면 내가 이해한 것이 시인의 마음인지 혹은 이렇게라도 국어교육과정에 문학을 반영시키고자 했던 교육부의 마음인지를 알 수 없었다. 아니, 교육부의 의도까지는 모르더라도 사후 나의 시가 교과서에서 '이런저런 의도였대'라고 명명된다면 과연 유쾌할지 의문이었다.


이동진기자는 영화 <더 메뉴>의 GV에서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예술인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였다. 극 중 셰프는 감독으로, 음식평론가는 영화평론가로, 광적인 미식가는 시네필로, 원자재 비용을 절약할 수 있도록 대체메뉴를 만들라 요구했던 레스토랑의 투자자는 영화투자자로 비유되었다는 의견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영화가 끝난 뒤 느낀 어느 공허함과 경쾌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예술가지망생인 나로서는 미처 꿈꿔보지 못한, 그러나 어느 부분만큼은 공감하고 있던 인생사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일인당 무려 1250달러를 지불해야지만 방문할 수 있는 레스토랑은 손님 역시 12명으로 제한하여 받는다.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는 미식가인 남자친구 타일러(니콜라스 홀트)와 함께 그 식당에 방문하게 되지만, 고립된 섬 위에 지어진 식당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을 내비친다. 유명셰프 줄리언 슬로윅(레이프 파인스)의 디너 코스 요리가 등장하면서, 손님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게 고급 레스토랑의 손님들은 자신들이 어느덧 메뉴의 재료가 된 지도 모른 채 섬 안에서 고립되고 만다.


영화 <더 메뉴>는 호러장르를 표방한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마치 관객이 영화 속 손님들처럼 코스요리를 대접받듯이 영화의 스토리전개는 고급 코스요리의 순서에 맞추어 진행된다. 미친 요리사와 고립된 섬, 알고 보니 요리사와 연관되어 있던 손님들,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손님임으로 집단 내에 유일하게 정상인에 가까운 주인공. 흔하디 흔한 서사이지만 <더 메뉴>는 이러한 호러장르를 철저히 이용하였을 뿐이기에 다소 괴이해 보일 뿐 식상하지 않다. 심지어 음식영화로서 지켜야 할 덕목도 놓치지 않는다. 음식과 호러가 교묘하게 섞였으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더 메뉴>는 앞서 말하였듯이 철저히 음식과 호러를 이용하였을 뿐이기에 이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종점이 아니다. 비유와 은유로 점철된 재치 넘치는 블랙코미디 영화이기에 영화 속에서 미친 요리사를 군말 없이 복종하는 스태프들의 마음이나, 현실적인 개연성 등은 관객 자신도 모르게 영화와 협의된다. 마치 현실을 기반에 둔 판타지 영화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동진기자의 말처럼 이 작품이 영화 그 자체 혹은 예술인에 관한 영화라면 이는 역시 문학에도 비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셰프는 작가일 것이고 투자자는 잘 팔리는 책과 좋은 글이 양극화되고 있는 현재 출판계의 상황과 구조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광적으로 세프를 좋아하는 미식가는 우상시되고 있는 작가들의 모습이며 셰프의 과오는 출판계 미투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더불어 평론가는 문학평론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 문득 현재 문학평론가의 말 한마디에 출판사의 흥망성쇠가 달릴만큼 출판시장 내에서 평론의 힘이 그 정도 일지 의문스럽다.


이동진기자는 또한 셰프를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인 자체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비단 예술인뿐만이 아닌 한 업계에 오래 종사한 다른 직업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직업마다 시작할 때에는 눈이 반짝였을 것이며, 연차가 높아질수록 일이 익숙해질 테니 권태에 빠지기 마련일 것이다. 그리고 연차가 쌓이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이상보다는 조직의 이상을 맞추어 버티며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술인 역시 예술을 노동으로 업을 삼는 직업인의 한 종류가 아니었던가.


이동진기자는 GV에서 이 영화는 계급론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며 덧붙였다. 셰프가 슬로바키아 출신의 이민자였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를 그저 백인남성으로만 보았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영화를 그토록 좋아함에도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미처 한 번에 알지 못했다. 나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그러니까 온갖 요리도구와 음식재료들은 알면서 정작 요리를 해보라 하면 덜 익은 고기를 내놓은 극 중 미식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득 도서관사서인 주제에 책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자못 숙연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견니> 팬에 의한, 팬을 위한 에필로그의 영화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