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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r 05. 2023

안정된 절망을 버림으로써 불확실한 희망을 택하다

<트루먼 쇼>를 보고

살면서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되는 영화들이 있었다. 중학생 땐 잘 이해되지 않았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시간이 흘러 다시 보았을 때라거나, 촬영지를 가기 전 보았던 <라라랜드>와 다녀온 뒤에 보았던 <라라랜드>가 전혀 다른 영화가 되는 마법을 겪었다던지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축되는 경험에 따라서 영화는 종종 내게 전혀 다른 작품으로 다가왔다. 작품은 그 자리에 그저 있을 뿐인데 내가 바뀐 것이었음이 책에만 적용되는 건 줄로만 알았다가 영화 <트루먼 쇼>를 다시 보고는 깨달았다. 어릴 때에는 그저 미디어의 폐해인 줄로만 알았던 이 영화가 실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근사한 영화였음을.

태어날 때부터 첫걸음마를 떼는 순간, 그리고 첫키스의 순간까지. 12억 인구가 지켜보는 리얼리티쇼인 트루먼 쇼는 트루먼 버뱅크라는 인물의 24시간을 관찰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다만 트루먼 그 본인은 모른 채로.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인 트루먼은 어느 순간 자신의 일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 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내, 직장, 그리고 자신이 어릴 적부터 줄곧 살아온 이 작은 동네 전체를.


나는 영화 <트루먼 쇼>를 고작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보았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영화를 좋아할 정도로 온갖 영화를 다 찾아보고 있었는데, <트루먼 쇼>가 명작인 것을 알고 난 뒤에 겁 없이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 아쉽게도 14살의 나는 이 영화가 주는 울림과 감동이 무엇인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관람을 마쳤고 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만으로 31세가 된 지금에서였다. 극 중 트루먼의 나이가 30세인 것을 생각해 보면 꽤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결말을 심드렁한 자세 관망하던 나는 15년이 지난 후에 똑같은 결말을 보고서 눈물이 고였다. 트루먼은 그대로였지만, 자란 것은 나였다

영화 <트루먼 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 무엇보다도 여러 관점으로 조망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트루먼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의 삶이 그야말로 '이상'해서가 아니라, 통제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나의 의지가 실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는 근원적 공포는 트루먼을 바깥세상으로 끝없이 나아가게 했다. 더불어 자신의 트라우마조차도 거짓임을 알게 된 트루먼은 거짓이 아닌 실체에 다가가기 위하여 거센 풍랑에 몸을 맡긴다.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트루먼의 외침은, 자유가 상실한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호소였다.


기어코 자신의 의지로 거짓된 현실(세트장)을 나가려는 트루먼을 붙잡고 감독은 트루먼에게 시종 바깥은 위험하다며 회유한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신을 위장한 악마 같기도 하며, 가스라이팅을 선사하며 함께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주변인 같으면서도, 자식의 삶을 통제하려는 부모처럼 보인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감독의 말에 트루먼은, 자신의 말이 마지막으로 송출되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저 매일 아침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듯 자신의 삶을 관찰한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 굿나잇. 이는 사실 거짓이었어도 자신만은 진짜였던 자신의 지난 삶에게 건네는 인사와도 같다.


그렇게 떠난 트루먼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면서도, 곧바로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 눈을 돌린다. 이는 마치 쉽사리 다른 자극을 찾아 나서는 시청자들을 직유하는 것 같지만 실은 열심히 내 삶을 응원하더라도 결국 타인일 뿐인 주변인을 떠오르게 한다. 절망스러운 안정을 버리고 고난일지 모르는 희망을 찾아 나선 트루먼에게 박수보다는 포옹이 더욱 어울릴지도 모른다. 삶에서 그와 비슷한 선택을 한 이들은 그의 심정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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