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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y 10. 2023

<비밀> 운명을 역행하여 일상을 선택한 이들의 투쟁

김은숙작가의 드라마에서는 심심치 않게 절대신에 대해 언급된다. 그중 '신'의 등장이 인물로까지 확장된 것은 드라마 도깨비인데, 도깨비와 저승사자에게 극 중 신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라며 인간에게 또 다른 시련을 선사한다. 어쩌면 소설 <비밀>이 한 문장으로 반드시 정의되어야만 한다면 저 대사만이 유일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모녀인 나오코와 모나미는 그만 외가댁으로 향하던 중 스키버스가 추돌되는 사고를 겪고, 나오코의 희생으로 딸인 모나미가 극적으로 깨어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딸 모나미의 몸속에는 엄마인 나오코의 영혼이 들어와 있었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남편인 헤이스케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지만 받아들이고 만다. 딸의 몸속에 들어있는 것은 분명, 자신의 아내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유명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비밀>은 각종 상을 휩쓸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다. 대략 10년 전에 영화를 먼저 본 나는 당시 충격적인 이야기와 20대초반이라는 나이대로 인해 영화의 정서를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괴랄한 작품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너져가는 가정(부부관계)을 회복해 보고자, 딸의 몸으로 관계를 시도하는 장면이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당시 히로스에 료코의 아름다운 얼굴만이 남았던 작품이었다. 원작을 다 읽은 지금에서야, 영화에서는 미처 그려지지 못한 나오코의 절박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당시 <비밀>이 출간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1998년도 작품인 것과 작가가 일본남성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은 그로 인한 장단점을 명확히 지닌 작품이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헤이스케의 절박한 심정이 애절하게 그려져다는 점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섬세한 필력은 순식간에 흡입력을 지니게 만들지만 지금의 시점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들이 더러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내상을 당한 남편인 헤이스케에게 동료들이 걱정하는 것이 그의 성생활이라는 점과, 성매매가 아무렇지 않게 묘사된다는 점. 아내인 나오코가 딸의 몸을 하고도 여전히 집안일과 음식을 도맡아 하고 있고 헤이스케는 그것으로 그녀가 아내임을 실감해 간다는 사실이 납득되기가 어렵다. 몸이 바뀐 것이 아들과 남편이었다면, 나오코가 헤이스케만큼 혼란스러웠을지에 대한 의문과 영화판에서 나오코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차치한다면 거대한 주제의식을 비극적인 한 가정의 운명으로 풀어낸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놀랍다. 이미 비극은 저질러져 버렸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운명 안에서 일상을 되찾아야만 한다. 운명을 역행해 일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투쟁을 그리며 결국 인간이 선택해야 할 것은 순응인지 혹은 불응인지에 대한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결국 헤이스케와 나오코가 선택한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인지 또는 운명에 대한 순응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결국 어느 방식으로든 살아내는 것을 택했다. 어쩌면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불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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