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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16. 2019

<조커> 아서 플렉 살인사건의 전말

그는 어째서 왜 그토록

(위 글은 본 영화 및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델마와 루이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순박한 시골 여성 김복남이 어째서 마을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한 살인마가 되었는지에 대해 다뤘다. 좁은 농촌 사회에서 약자들의 약자로 살아가던 김복남은, 어느 날 딸의 죽음으로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모든 이들을 스스로 단죄하기에 이르고, 영화는 그런 그녀의 살인사건이 단순한 고어물이 아닌 한 개인의 파국임과 동시에 그런 그녀를 극한으로 몰고 간 사회의 이기심에 대하여 말한다. 또 다른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역시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던 두 여성 델마와 루이스가 강도 용의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뤘다. 그녀들의 끊임없는 불운은 그들을 더욱 걷잡을 수 없는 불행으로 빠트리게 되고, 그렇게 그 두 사람은 비로소 강도 용의자가 돼서야 탈출과도 같은 자살로 그 들의 불행을 끝맺는다. 영화 <조커>는 김복남이 왜 살인할 수밖에 없었는지와 델마와 루이스가 왜 강도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하는, DC적 사회고발 영화일 것이다.

병든 노모를 모시며 광대로 일하는 평범한 소시민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분). 그는 어릴 적 얻은 뇌질환으로 인하여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튀어나오는 병을 앓고 있지만 그럼에도 유명한 광대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는다. 비록, 광대 일을 하다 강도를 당하고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받는 등 세상이 그에게 무례할지라도.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취객들에게 폭행을 당하게 된 아서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의 살인은 부유층을 향해 던진 서민층의 폭탄과도 같은 사건이 되어버린다. 본의 아니게 시민들의 영웅 아닌 영웅이 되어버린 그. 그리고 그에게  닥치는 연속적인 불행. 그는 과연 미쳐가는 이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광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 <조커>의 이야기 줄거리는 꽤 간단하다. 불안한 사회구조 속에서 약자로 살아가던 한 남자가,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이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영화는 유명 원작 코믹스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꽤 현실적이다. 가상의 도시는 비단 가상이라고 치부하기엔 현 미국의 사회구조(또는 전체적인 국제 현상)가 끌어안는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만화적 상상력은 최대한 가린 채 한 남자의 끝없는 불행과 연속된 악운을 통하여 소름 끼치는 현실을 처연하고도 서글프게 그린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 <조커>가 기타 조커를 다룬 영화들과 비교되는 지점임과 동시에 코믹스 영화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유일 것이며, 실제 이 영화의 상영관에 FBI가 나선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조커> 속 고담시에서 보이는 피라미드식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그 속에서 배척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특권층들의 무관심. 총기 소지 합법 국가에 따라오는 딜레마까지. 영화 <조커> 속 사회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로 낯익다.


그렇다면 영화 속 배경과 더불어 '아서(조커)' 개인의 불행으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어떠할까. 영화 <조커>는 앞서 설명한 기이한 사회 구조 속의 전형적인 소시민이자 약자로 표현된다. 조커의 기원에 관하여 다룬 영화들은 앞서 많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들이 조커에게 동감하며 그가 안타까운 이유는 조커 이전의 '아서 플렉'이란 한 개인은 절망적이고도 불우한 상황에서도 코미디언이란 꿈을 잃지 않는 평범한 시민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극 중 아서가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폭력들(심지어 그 폭력은 아래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것들이며 이는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묘사된 계층 간의 갈등과도 흡사하다.)과 그에게 일어나는 연쇄적인 불행들은  그의 인생을 더욱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마치 '이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질문을 던진다. 티끌 모아 티끌이며 개천에서 용 나더라도 그 개천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의 사회구조가 한 개인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속에서 배트맨이 본인이 선택한 영웅으로서의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뇌하는 인간의 어두운 단면에 대해 그려졌다면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대중들에게 선택된 또 다른 의미의 안티 히어로적인 양상을 보인다. 불행은 끊임없이 그를 몰고 가, 결국 그를 미쳐버리게 만들었지만 특권층들의 무관심과 빈곤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대중은 그를 열띤 환호로 맞이하며 그를 영웅으로 추앙한다. 아서 플렉은 자신의 아버지와도 다를 바 없던 코미디언 머레이가, 자신을 비웃음거리로 삼으며 조롱한 것도 모자라 하위계층에 대한 무시와 몰이해적인 태도를 보이자 당초 자살하려던 자신의 계획을 뒤엎고 토크쇼에서 그를 살인해버린다. 조커의 추종자는 브루스 웨인 내외를 총으로 쏴버리며 조커의 살인에 동감하는 대중들을 그저 못 배운 부류의 인간들로 치부해버린 그를 응징한다. 조커의 탄생은 비록 우발적인 살인과 그로 인한 연쇄적인 범죄들로 점철되었지만 머레이와 브루스 웨인으로 대표되는 상류층들을 처단하며 비로소 어두운 고담 시 길바닥 위에 무능력한 공권력을 짓밟고 일어난 것이다.


조커는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후 화장실로 도피한 후 마치 앞전의 사고가 하나의 연극이었던 듯 춤을 추기 시작한다. 지하철 살인사건 용의자로 쫓길 때에는 계단에서, 머레이를 살해한 후로는 당당히 고개를 들곤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인생에서 크나큰 에피소드에 불과하길 바라던 그 살인사건은 어느덧 아서에게선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며  연극과 실제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렇게 자신을 우러러보는 관객들 앞에서 스스로 유약했던 아서를 비웃듯 완전한 조커로 분하는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불행이 자살이라는 결론으로 그들을 내몰았다면, 조커의 불행은 그를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불행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명언은 조커가 된 아서 플렉에게는 사뭇 다를 것이다. 조커가 된 그의 인생은, 그에게만은 적어도 희극이기에.


이토록 사회적 약자들의 통쾌한 복수를 그려낸 영화가 또 있을까.
그 누가 이토록 조커를 처연하며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도록 그려낼 수 있을까.
호아킨 피닉스는 어쩌면 이토록 안쓰러운 조커를 그려내기 위해 배우가 된 것은 아닐까.
토드 필립스가 견고히 쌓아 올린 이 영화의 서사를, 감히 누가 쉽게 평가 내릴 수 있을까.

DC가 드디어 마블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히함을 넘어서서 김복남과 델마와 루이스, 다니엘 크레이그를 포함한 이 모든 세상 속 약자들을 위한 씁쓸한 힐링 영화.

그러니까, 내게 무례한 모든 사람들에게 역지사지(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은 지 일인 줄 안다)를 몸소 실천해 보인 미친 영화.

2019.10.9 Instagram에 남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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