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주제는 흔히 다루어졌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결국 운명은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좌절감을 주기 위해 전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관한 공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절망과 희망을 적절하게 엮은 <가타카>는 모든 것이 대립적이다. 자연임신과 인공수정, 선천적과 후천적, 믿음과 불신, 예측과 엇나감 등 영화에서는 반대되는 두 가지 관념들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은 시종 올곧게 직선적이다. 이는 영화 <가타카>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유전자로 인간의 등급이 암암리에 나눠지는 근미래에서, 인공수정된 동생과 달리 자연임신으로 태어난 첫째는 인생의 출발점부터 다르다. ID카드가 곧 자신의 유전자인 이 세상에서는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취업부터 난관을 겪을 만큼 차별이 만연하다. 어릴 적부터 온갖 안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빈센트(에단 호크)는 우주비행의 꿈을 이루고자, 불구가 된 수영선수 제롬(주드 로)의 유전자정보를 빌리기로 하고 그는 제롬으로서 새 인생을 설계한다.
30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꽤나 사실적이다. 무엇보다 섬뜩한 점은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유전자로 인생의 난이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건든다는 것이다. 좋은 외모와 가정환경 등 태어나면서부터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 등을 영화는 SF요소로 실체화시킨다. 영화 속 설정은 포괄적인 인간의 기본적 자질과 배경을 하나로 응축시켜 표현한 도구인 것이다. '유전자로 개인을 판단하는 사회'를 단순히 외모라던가 배경으로 집어넣는다 해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계급사회가 법적으론 사라졌다 할 지어도, 모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도 SF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가타카>는 끊임없이 전진하라 말한다. 주어진 개인의 능력을 갈고닦아 운명을 바꾸는 주인공의 모습에 비하여, 좋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지 못한다. 쟁취해야만 삶이 살아지는 이와 이미 쥐고 태어난 이들의 차이점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말한다. 한계너머의 삶을 희망하며 전진하라고. 더불어 극 중 제롬의 죽음은 안락사제도를 떠오르게 한다. 자신이 아닌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영화 <미 비포 유>가 떠오르기도 한다.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제롬은 자신의 또 다른 한계를 뛰어넘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 빈센트에게 신분을 빌려준 제롬 자체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 <가타카>의 감독이자 각본가인 그의 다음 작품은 무려 <트루먼 쇼>이다. 관음과 폭력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 속 트루먼도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깨어냈다는 점에서 <가타카>의 주인공과도 같다. 얼마나 깊고 열린 생각을 해내야만 이러한 명작을 두 작품이나 만드는 걸까.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얼마나 잘 조리하고 건드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은 아닐까.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이 끝내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 어떤 SF보다도 판타지 같으면서도, 또 어떤 다큐멘터리보다도 인간적이다. 중요한 것은 두 작품 모두 어느 쪽의 장르로 택할지는 결국 관객의 몫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