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하윤은 유현이 자리를 뜸과 동시에 서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서희에게 하윤은 환한 미소와 함께 성큼 다가섰다.
“아가씨 이름이 서희라고 했나요.”
“아, 넵!”
서희는 아기 같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놓으라 말하는 하윤에게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색함을 느끼며 주저하는 서희의 기색을 읽었는지 하윤은 서희의 손을 놓칠세라 더더욱 꼭 잡았다. 그리고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서희에게 말을 붙였다.
“우리 현이랑은 어떻게 지내는 사이이신지?”
10살짜리 아이답지 않은 연륜이 묻어나는 말투와 눈빛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예상한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희는 그동안의 사회생활로 단련된 미소를 장착한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유현 씨…, 아니 사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파트타임 직원이에요. 사정이 있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잠깐 쉬던 중 아버지 소개로 잠시 동안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는지 하윤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하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하윤도 그런 서희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녀의 품에 기대었다. 영락없이 애교 많은 10살 소녀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딴판이었지만.
“지금까지 몇 백년을 혼자 외롭게 살아갔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퍽 상하네요. 내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애가 참 인물도 훤하고 괜찮은데….”
팔불출 같은 말이었지만 서희는 하윤의 진심 어린 모성애가 느껴져 듣기 거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현의 인물이 제법 훤칠한 것은 사실이었다. 서희는 이 걱정 많은 아이이자 어머니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어머님 말씀이 천번 만번 맞습니다. 유현 씨는 참 좋은 사람이죠.”
“언니도 참 좋은 분 같아요.”
하윤과 서희는 서로를 향해 해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곧 하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월영서림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걸레를 손에 든 소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 곳곳의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현이 이 녀석이 글공부하고 책 읽는 것만 곧 잘하지, 이런 건 영 서툴다니까요.”
걸레가 더러워질수록 하윤의 이마는 반짝반짝 땀으로 빛났다. 평소 원체 깔끔한 성격인 유현 덕분에 월영서림은 헌책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먼지 한 톨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하윤은 숨어있던 먼지를 샅샅이 훑어내고 있었다. 서희는 살짝 광기 어린 모습으로 구석구석 걸레를 휘두르는 하윤의 모습에서 유현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유현씨가 누굴 닮아 그렇게 깔끔쟁이인가 싶었는데, 어머니를 닮았었네요.”
서희는 하윤의 바지런한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10살짜리 조그마한 몸으로 땀 흘리는 모습에 아동학대를 한 듯한 묘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서희의 마음도 모른 채 하윤은 야무지게 서점의 선반, 바닥, 책상 등을 모두 예외 없이 쓸고 닦기 바빴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평소에도 유현 씨가 잘 치우는 편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하윤이 집어 든 걸레는 한참을 닦아내도 좀처럼 더러워지지 않았다. 부끄러웠는지 하윤의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하윤은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서요. 오랫동안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혼자 두었어요.“
“어머님….”
“현이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고, 나보다 몇십 배는 넘는 세월을 살아온 것도 알고 있지요.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못다 해준 건 무엇이든지 하고 싶네요.”
서희는 하윤의 이야기를 듣고 멍하게 하윤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어른이 된 아들을 만난 아이가 된 어머니. 어떻게든 못 해준 사랑을 전하고 싶은 그 서툰 모성애가 계속 눈에 밟혔다. 결국 서희도 팔을 걷어붙이고 정리를 도왔다.
틈틈이 정리하는 와중에도 하윤은 끊임없이 유현에 관해 물었다. 밥은 잘 먹는지, 옷은 잘 입는지,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지내는지 모든 것이 유현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한참을 유현에 대한 신상을 묻던 하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힘겹게 꺼냈다.
“…우리 현이 왜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는 건지 언니는 알고 있나요?”
“그건….”
서희는 희미하게 예상만 했을 뿐, 답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하윤의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혔다. 언뜻 그가 전생의 인연과 관련하여 죽지도, 살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녀가 물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 그건 서희 씨가 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서희와 하윤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장보기를 끝마친 유현이 양손 가득 시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서희와 하윤, 두 사람 모두 너무 긴장하여 현관 종이 울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다. 서희는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왠지 모르게 심장 한 편이 따끔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고 유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러섬 없는 눈빛으로 유현을 마주하는 하윤의 모습에는 유서 깊은 양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하윤은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유현에게 엄중한 물음을 내렸다.
“그렇다면 그 답은 현이 네가 들려주어야겠다.”
“….”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냐 물었다.”
유현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성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남았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현은 어머니에게도 제 속내를 다 드러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윤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아이는 이전처럼 울음을 펑펑 쏟아내는 대신 눈물을 힘껏 참아 삼켰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누구보다 울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 아들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대신 몸 성하게, 마음 편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된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하윤은 유현에게 다가가 그를 꼭 껴안았다. 유현은 자신보다 한참 작고 어린 어머니를 살며시 안아드렸다. 500년 전 멈춰있던 모자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꼬르륵-.
경쾌하기까지 한 배곯은 소리에 말없이 지켜보던 동주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희가 뒤늦게 말려보았지만 이미 웃음이 터진 동주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하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유현은 아무 동요 없이 침착하게 놓아두었던 장바구니를 정리했다.
“곧 저녁상을 차려오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저도 같이 도울게요.”
서희는 유현을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껏 유현은 서점 외의 일을 서희에게 부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순순히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현과 동주의 거처는 서점과 연결되어 있었다. 서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곳까지 건너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서희는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서점과 연결된 현관문을 넘었다. 서점 문을 넘어서자 소담하게 가꾼 작은 마당이 서희를 반겼다. 달빛을 받아 환하게 피어난 작은 꽃들과 정성껏 손질된 나무들이 정갈한 운치를 뽐냈다.
유현의 집은 마당을 건물들이 둘러싼 전통 가옥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신기한 듯 유현의 집을 본 서희는 집이 제 주인을 닮는다는 시쳇말을 새삼 실감했다.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유현의 집은 오랜 세월이 느껴지기보다 정갈하고 소담했다. 이 집 역시 유현과 같이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부엌은 이쪽입니다.”
홀린 듯이 집과 마당 구석구석을 살피던 서희는 유현의 말에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유현과 함께 부엌에 들어선 서희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상상 속 부엌과 유현의 부엌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아궁이가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유현의 부엌은 인덕션과 냉장고, 오븐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공방에서 가져온 듯한 그릇들과 컵이 즐비한 찬장까지 보자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부엌이 제 생각하고 꽤 다르네요.”
“어째서요. 아궁이에 불이라도 땔 줄 아셨던 겁니까.”
유현의 낮은 웃음에 서희의 귀가 달아올랐다. 유현은 장을 봐온 음식 재료들을 능숙한 손길로 손질했다. 서희는 유현의 정교하고 빠른 칼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는 유현의 칼질에선 우아함까지 느껴졌다. 500년 동안 제 한 몸 하나쯤은 충분히 건사했다는 그의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음을 유현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사 왔죠?”
“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정도면 될까요?”
유현은 걱정스러운 듯 서희에게 자꾸 의견을 물었다.
“당연하죠. 이거 하나면 게임 끝이라고요.”
서희는 장바구니에서 제가 찾던 물건들을 찾아내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유현만큼 능숙하진 않았으나, 그녀는 한때 요리를 즐겼던 이였다. 서희가 즐겨 만드는 몇 가지 음식은 외국인들도 극찬하며 냉장고에 가득 밀어 넣을 정도로 중독성이 있었다.
“잘 되어가고 있니? 내가 좀 도와줄까?”
시간이 좀 흐른 뒤, 부엌 상황이 퍽 궁금했는지 하윤이 부엌을 기웃거렸다. 서희는 깜짝 놀라 그런 하윤을 서둘러 부엌에서 내쫓았다.
“많이 시장하시죠? 거의 다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래…, 필요한 것 있으면 바로 알려주렴.”
하윤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뗐다. 서희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상이 차려졌다. 하윤의 입맛에 맞춰 유현과 서희가 준비한 음식이 가득한 한 상이었다. 하윤은 대청마루에 일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 유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현이 직접 하윤의 앞으로 상을 올렸다.
“시장하실 텐데 많이 드시지요.”
첫술을 뜨는 하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상에는 살아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젓갈과 나물, 산적들이 있었고, 한편에는 케첩 소스로 반지르르 빛이 나는 소시지 볶음도 있었다. 어머니의 식성을 잘 아는 유현과 10살 초등 아이의 입맛을 잘 이해하는 서희의 합작품이었다.
하윤의 첫 젓가락질은 윤이 나게 잘 조려진 소시지볶음이었다. 제아무리 위엄있는 말투와 몸가짐을 꾸며내어도 10살 소녀의 입맛은 정직했다. 그 외에도 감자채볶음이라던가 메추리알 장조림 같은 반찬도 곧잘 젓가락이 갔다. 유현은 서희에게 조용히 감사의 뜻을 담은 눈인사를 건넸다.
유현이 장을 보러 나서기 전 서희가 그를 붙잡고 한 당부 덕분이었다.
“유현 씨, 다른 건 몰라도 소시지는 꼭 사 와야 해요. 케첩도요. 메추리알이나 감자 같은 것도 사 오면 더 좋고요.”
서희는 부지런히 소시지를 입에 넣는 하윤의 모습을 보며 새삼 그녀의 실제 나이를 실감했다. 통통한 볼을 열심히 우물거리며 밥을 먹는 모습이 영락없는 열 살배기 소녀였다. 유현이 준비한 찬들도 제법 입맛에 맞는지 하윤은 먹성 좋은 성장기 아이답게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아이는 식사를 끝낸 뒤 싹 비워진 상을 보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솜씨가 제법인 걸 보니 그동안 먹는 것은 걱정이 없었겠구나.”
“어머니 손맛을 닮았나 봅니다.”
유현도 밥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워낸 상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얼마나 공을 들여 상을 차려냈는지 옆에서 지켜봤던 서희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상을 물린 뒤 유현은 하윤에게 진한 코코아를 타 주었다. 전생에서는 숨이 넘어가던 순간까지도 막내아들 걱정으로 차마 눈을 쉬이 감을 수도 없었던 그녀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아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따뜻한 밥상을 받게 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다.
이제와 보니 인생이 참으로 쓰고 달았다. 이 코코아처럼 말이다. 부드럽고 따끈한 코코아를 한 모금 삼켰을 때 복받쳐오는 감정 때문에 하윤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유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하윤의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머니,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우리가 해후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나를 내보내는 것이냐?”
유현이 닦아낸 손길이 무색하게 하윤의 눈물은 계속해서 차고 넘쳐흘렀다. 아이는 저를 달래려는 손길을 단호하게 쳐냈다. 허공에 멈춰 선 손을 차마 거두지도 못한 유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님, 이미 저희 인연은 지난 생에 끝났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기억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은 어미에게 다시 자식을 앗아가는 불효를 저지르려 하는 것이냐? 네가 과거의 인연이든, 현재의 인연이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하윤의 울먹임에 유현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불효를 저지르고 계신 건…, 정작 어머님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어머님을 되찾는다면, 하윤이의 부모님은 열 살배기 딸을 잃습니다.“
“그, 그건!”
“어머니, 어머니의 진짜 인생은 10살 정하윤의 삶입니다. 누구보다 자식 잃은 슬픔을 아시는 분이 지금의 부모님께 그 고통을 안겨드리려는 겁니까.”
“….”
하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현은 긴 한숨을 내쉰 후 결심을 굳힌 듯 쐐기를 박았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모두 잊으세요. 과거의 인연에 묶인 인간은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저처럼 말이지요.”
유현의 말을 들은 하윤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온몸의 물이 다 말라버릴 정도로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유현은 그런 하윤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높다란 감나무에서 떨어져 서럽게 울던 어린 날의 제 모습과 같은 작고 여린 어머니를 꼭 안아주었다.
한참을 목 놓아 울던 하윤은 결국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유현은 어머니를 소파에 눕히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들면서도 하윤은 유현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되풀이된 생이었지만 이 아이의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전생의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유현은 잠시 덮어두었던 하윤의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그의 매끈하고 긴 손가락이 책장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잠시 뒤 묵빛 종이와 하윤의 몸에서 금빛 글자들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유현이 그리움을 가득 담아 한 자, 한 자 힘겹게 써 내려갔던 사모곡들이었다. 금빛 글자들은 두 모자의 주변을 바람처럼 부드럽게 휘감고 곧 부드러운 빛이 되어 공기 중으로 스미듯 녹아내렸다.
지금 무슨 꿈을 꾸는지 몰라도 잠든 하윤의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멍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희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곧 짧은 통화를 끝낸 서희가 유현에게 말했다.
“곧 하윤이 부모님께서 도착하신다고 해요.”
식사가 끝난 뒤 서희는 하윤에게 슬쩍 물어두었던 부모님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윤의 집은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서점에서 제법 먼 거리였지만 하윤의 부모님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월영서림에 도착했다.
“하윤아!”
“정하윤!”
젊은 부부가 하윤을 부르며 서점 문을 부서뜨릴 듯 세차게 열어젖히며 서점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들은 생김새와 행동거지까지 한눈에 보아도 하윤의 부모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이와 꼭 닮아 있었다. 유현의 무릎을 벤 채로 깊이 잠든 하윤을 발견한 여자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하윤의 모습을 살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남자는 커다란 손으로 수차례 마른 세수를 하였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진정이 좀 됐는지 남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연락받았던 하윤이 아빠입니다. 제 딸을 잘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낸 후 하윤의 어머니도 유현과 서희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꼭 사례하겠습니다.”
“사례는…, 괜찮습니다.”
유현은 하윤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의 눈으로 날카롭게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지 확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잠시 뒤 유현은 하윤의 부모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이들이라면 어머니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섰을 때 유현은 비로소 저를 꼭 붙잡은 어머니의 작은 손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잘 살펴 주세요.”
하윤의 아버지는 곧바로 하윤을 품에 안아 들었다. 아이는 얼마나 깊이 잠에 빠져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익숙한 듯 제 아버지의 품에 푹 안겼다. 하윤의 부모는 다시 한번 몇 차례나 감사 인사를 남긴 후 빠르게 서점을 떠났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월영서점의 문을 넘는 하윤의 모습을 유현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하윤의 가족이 떠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서희는 유현이 꼭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시끌벅적했던 소동이 마무리되자 아이가 사라진 조용한 서점의 풍경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서희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에는 아직도 달이 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 한편에 박혀있던 그리움이 하룻밤 꿈처럼 사라져 버린 지금, 그의 텅 빈 가슴을 과연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서희 씨?”
“유현 씨, 우리 그냥 잠깐만 이렇게 있어요.”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유현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유현은 당황한 듯 몸이 굳었지만, 곧 순순히 서희의 품에 자신을 맡겼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