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최근 학교에서 친구들과 유행하는 놀이를 했는데….”
“어떤 놀이였습니까?”
“최면으로 전생을 체험하는…, 정말 별다른 것 없이 애들 다 하는 장난이었다.”
“하아…, 그날 이후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신 겁니까?”
유현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제법 날카로웠다. 그에 반해 하윤이는 점점 주눅이 들었는지 목소리에 영 힘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유현을 꼼짝달싹 못 하게 했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어른에게 혼이나 풀이 잔뜩 죽은 아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서희가 흥분한 유현의 손을 슬며시 잡아 끌어당겼다. 눈치를 보던 하윤은 우물쭈물 말을 이어갔다.
“최면에 걸렸던 날부터 조금씩 신기한 꿈을 꾸기 시작했단다. 황금빛 빛무리들이 잠자리로 날아드는 꿈이 시작이었지.”
금빛 빛무리라는 말에 하윤을 제외한 모두가 흠칫 놀랐다. 서희는 정남과 함께 한 지난 여름밤 보았던 금빛 글자들을 떠올렸다. 하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현은 저도 모르게 낮게 탄식했다. 유현이 전생의 기억을 써 내려간 책에서 튀어나온 인연의 글귀들이 최면을 계기로 하윤을 찾아가 전생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꿈속에서 널 처음 보았지만 나는 한눈에 네가 내 자식이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단다. 그날 이후로 잠이 들면 종일 네 꿈만 꾸었지.”
“…대충 상황은 알겠습니다.”
유현은 서가로 다가가 예의 검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책을 열자 먹빛 종이 위로 금빛 글씨가 이가 빠진 듯 드문드문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과 인연을 묶어둔 책의 봉인이 불안정해진 것이다. 심각한 유현의 표정을 채 살피지 못한 소녀는 그저 해맑은 표정으로 아들이 꺼낸 책을 신기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은 동주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건가. 아무리 최면에 걸렸더라도 스스로 전생의 기억까지 되찾아 내는 건 처음 봤다.“
“그 정도만 하시죠.”
유현은 보기 드물게 동주에게 눈을 흘겼다. 그렇다고 눈치를 볼 동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유현은 머리가 아픈 듯 연신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모습을 본 하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현의 얼굴을 감싸며 야단을 떨었다.
“아가,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180cm는 훌쩍 넘는 덩치의 유현이 어린 소녀에게 양 볼을 붙잡힌 채 아기 취급당하는 광경을 서희는 가능하면 꼭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서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앞의 광경을 외면했다. 그녀는 최근에 본 슬픈 영화를 떠올리며 바르르 떨리는 입가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설마 이 늦은 시간에 혼자 오신 것은 아니시죠?”
“내 겉보기가 이러하다고 너까지 날 아이 취급하느냐. 어르신들은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내가 알아서 잘 나왔다.”
“부모님 몰래 나왔다는 말이네.”
오늘도 어김없이 위아래 없는 일침을 놓는 동주였다. 하윤은 자신을 곤경에 상황을 만든 동주를 향해 버럭 호통을 쳤다.
“너는 대체 뉘 집 아이길래 사사건건 어른들 일에 끼어들어 간섭하느냐.”
하윤이 추가 크게 호통을 쳤다. 그 모습을 곁에서 전부 지켜보던 유현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졌다.
“어머니, 정말로 부모님 몰래 혼자 나오신 겁니까?”
“….”
하윤은 간신히 재회한 아들이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현은 바짝 속이 탔다. 한동안 말없이 책과 하윤을 번갈아 살피던 유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매불방 유현을 바라보던 하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그리던 재회 장면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하윤이 끝내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유현, 네 녀석은 지금 이 어미를 만난 것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소녀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현은 또다시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유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하윤을 달랬다.
“어머니, 제가 어찌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제 꿈을 그리 꾸셨다면 제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왜 이러시나요.”
어린 시절 달콤했던 어머니의 냄새와 다정한 목소리, 따스한 손길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립다는 말로도 다할 수 없을 마음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 담은 그의 사모곡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현은 제 손에 들린 불완전한 책을 아쉬운 눈으로 훑어내렸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가 전생의 기억을 제 도움 없이도 되찾은 것은 최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고일 대로 고여버린 자신의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과거의 유현이 이것저것 따져대는 현실의 유현보다 한 걸음 먼저 그녀에게 닿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어머니, 전생을 모두 기억해 내신 건가요?”
“그래, 모두 다 기억한단다.”
“얼마나 기억을 되찾으신 겁니까?”
“너를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 네가 처음 내디뎠던 작은 걸음, 나를 어머니라 불러주었던 작은 입술까지도. 모두 다 기억한단다.”
하윤은 유현의 왼쪽 앞머리를 살짝 걷어 올렸다. 희미해져 자세히 보아야 하는 작은 흉이 눈썹 옆에 있었다.
“집 앞마당 감나무를 딴다고 올라갔다 떨어졌던 날을 기억하느냐.”
“네, 어머님께 태어나서 제일 많이 혼난 날이었지요.”
유현은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을 따겠다고 나무에 올랐다가 어머니 눈앞에서 고꾸라져 떨어진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올렸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있노라니 세상 천진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유현도, 그의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유현은 용기를 내어 어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을 꺼내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은 편히 가셨습니까?”
역모의 누명을 쓴 스승과 절친이었던 아버지 역시 숙청의 불꽃을 피할 순 없었다. 하루아침에 한성에서 알아주던 대갓집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아버지와 형님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식솔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하윤은 유현을 위하여 더는 자세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화가 일어났던 밤, 유현의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하여 모든 가족이 죽음의 위협에 맞서야 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힘을 모아 집안의 막내였던 유현을 지켜내었다. 결국 어머니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급히 도망쳐야 했던 그날. 그 무력하고 서글펐던 기억을 떠올린 유현의 가슴 한편이 쿡쿡 쓰려왔다. 그가 참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거라. 이제부터 너는 양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
“그저 네가 해야 할 일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죽지 말고 살아만 남는다면 살아생전 언젠가는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
마지막 순간 어머니와 아들이 나눈 대화의 그날이 실로 그들을 찾아오기는 하였다. 비록 어머니가 생을 한 번 돌아오고, 아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지난한 세월을 지나와 겨우 만났지만.
“그날 이후로, 잘 지내셨나요.”
“나야 잘 지냈지. 기준이가 신경을 많이 써주었단다.”
유현은 어릴 적부터 친우였던 기준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전생의 기준, 그러니까 현생의 이강우는 유현이 실종되자 곧바로 유현의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셨다. 그는 기꺼이 죽는 날까지 유현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극진하게 모셨다.
“너는,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었느냐.”
하윤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윤은 작은 손으로 유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 500년이라는 지난한 세월을 버텨온 막내아들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런 하윤의 마음을 읽은 유현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힘껏 웃어 보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좋아하는 책에 파묻혀 지내왔습니다.”
“그래, 끼니도 거를 정도로 책을 좋아하더니 결국 이렇게 책방까지 차렸구나.”
하윤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끼고 살았던 유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좋아하던 책으로 가득 찬 이 공간은 고단한 삶을 살아온 유현에게 위안이 됐으리라. 하윤과 유현은 서로 못다 한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다시 만나 다행이라며 서로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꼬르륵-.
긴장이 풀려서일까, 하윤의 작은 배에서 났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렁찬 소리가 서점 안에 울려 퍼졌다. 한참 심각한 이야기에 집중했던 탓에, 잠시 고요해진 공간을 뚫고 배곯은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순식간의 하윤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유현은 하윤의 손을 붙잡고 정답게 물었다.
“어머니, 혹시 지금 시장하십니까.”
하윤은 고개를 급히 내저었다. 하지만 성장기인 몸은 주변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듯 꼬르륵 소리를 연신 밖으로 내보냈다. 결국 다시 하윤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서희는 이 타이밍에도 눈치 없이 한 마디를 얹으려는 동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장하시다면 소자가 어머님께 상을 차려드려도 될지요?”
“현이 네가?”
하윤은 깜짝 놀라 나오던 눈물들이 모두 쏙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유현은 숟가락 하나도 제 손으로 놓은 적이 없이 고이 자란 양반집의 막내 도련님이었다. 그런 아이가 자신에게 밥상을 손수 차려준다니….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네가 밥을 차려온다니, 세상이 참 많이 바뀌긴 했구나.”
“지금껏 제 한 몸쯤은 거뜬히 건사해왔습니다. 상 한번 차려내는 것쯤 일도 아니지요.”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양반집 도련님도 뭣도 아닌 그가 지금껏 살아오지 않았나. 결국 제 몸 하나쯤은 능히 건사할 줄 알아야 했을 터였다. 몇 번 유현에게 밥상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서희는 유현의 수준급 음식 솜씨를 알기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자취 경력만 500년인 사람이니까.’
“잠깐만요, 유현 씨.”
서희는 저녁을 준비하러 자리를 떠나던 유현을 잠시 붙잡았다. 서희와 진지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한참 주고받던 유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서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