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가 머무는 어느 고서점의 이야기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였다. 서희는 휘영청 환한 달이 떠오른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 다 차오르지도 않은 덜 여문 달이었음에도 구름 하나 없는 깨끗한 밤하늘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네.”
서희는 가을 밤하늘을 밝게 빛내는 달을 바라보며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보았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버지도 잘 계시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그녀 나름의 안부 인사였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아무 말 없이 집에만 처박혔던 어리석은 딸 걱정에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편히 눈을 감지도 못했을 아버지를 떠올리자, 서희는 그저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오죽하면 나와 일면식도 없는 서점 주인에게 다 큰 딸을 돌봐 달라는 약조까지 남기고 갔을까.
하지만 그 약조 덕분에 서희는 달빛이 내리쬐는 늦은 밤까지도 문을 여는 이 기묘한 책방의 일원이 되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일들을 일상처럼 겪어 내보니, 어느덧 봄과 여름이 지나갔다. 유현이 맡겼던 전산 작업도 슬슬 마무리 단계였고 이제는 덤덤하게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도 좋을 정도로 상실의 고통이 어느 정도 아물었다. 고통이 지나간 빈자리를 채우는 건 짙은 그리움이었다.
“유현 씨, 전생의 인연이 있다면 후생의 인연도 있는 거겠죠?”
“다음 생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시군요.”
유현의 물음에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희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내밀었다. 제법 선선해진 가을밤에 어울리는 알싸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차였다. 차를 한 모금씩 마시자 헛헛했던 속이 알맞게 따스해졌다.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보통의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뭐 그런 건가요?”
“네, 정확히 말하자면 인연이 있는 자들은 후생에 옷깃이라도 한 번은 꼭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연의 끈을 보고, 얽혀있는 전생의 연을 풀어내며 살아가는 이가 한 말이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유현의 설명을 듣고 나니 서희는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비록 후생에서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아버지를 다음 생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먹먹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인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서희는 갑자기 제 앞에 있는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일면식도 없던 자신을 책임진다며 덜컥 고용까지 한 이 남자. 사람의 인연이 보통의 우연이 아니라면, 이 기묘한 인연으로 엮인 유현과 자신은 과연 어떤 인연이었을까.
‘유현 씨와 나도 인연의 실로 엮여 있나요?’
서희는 유현에게 질문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가지런히 서가에 꽂혀있는 저 검은 책들 사이에 유현이 자신을 기억하며 써 내려간 책도 있는 것은 아닐까. 서희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기 유현 씨….”
빈 찻잔을 정리하던 유현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그때 입구의 종이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발칵 열렸다.
딸랑, 딸랑-.
이곳 월영서림을 찾는 여느 손님과는 다르게 썩 요란스러운 등장이었다. 게다가 소란스럽게 문을 열어젖히며 서점에 등장한 이는 야심한 달밤에 반겨주기에는 조금 곤란한 감이 있었다. 불쑥 찾아든 손님은 10살 남짓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였다.
“어머, 얘, 설마 혼자 온 거야? 엄마 아빠는 어디 계시고?”
서희는 늦은 시간 홀로 나타난 아이에게 깜짝 놀라 달려갔다. 높다랗게 묶은 양 갈래머리가 잘 어울리는 깜찍한 외모를 지닌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했다.
“부모님을 잃어버렸나 봐요.”
서희는 당황하며 유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유현은 굳은 표정으로 멈춰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반응을 보인 것은 방금 서점에 들이닥친 소녀였다. 소녀는 유현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가 유현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는 서희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고, 내 새끼! 어쩌다가, 어쩌다 이렇게…!”
소녀는 유현에게 매달려 곡소리를 내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유현은 통곡하는 소녀에게 붙잡혀 어쩔 줄을 모르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소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어머니,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소자는 무탈하게 잘 지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어머니. 서희는 유현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듣고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양 갈래 소녀가 다 큰 성인을 어루만지며 자식 취급을 하고, 그런 아이를 장성한 남자가 극진히 대우하며 어머니라 부르는 이 기묘한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서희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결국 올 것이 왔구먼.”
언제 나왔는지 동주가 서희 곁에서 끌끌 혀를 찼다. 여느 때와 달리 서희는 이 난감함을 공유할 수 있는 동주의 등장이 퍽 반가웠다. 그녀는 혹시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동주에게 상황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설마 정말로 저 아이가 유현 씨의….”
“다 들었으면서 뭘 더 물어. 보는 그대로지.”
동주는 피식 웃으며 눈앞의 난장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소녀는 유현을 품에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언뜻 보면 그 모습은 흡사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찾은 아이와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으니, 서희로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서희 씨, 죄송하지만 물 한 잔만 부탁드립니다.”
곤란한 것은 유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두면 탈진할까 봐 걱정될 정도로 아이는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아이는 서희가 급히 떠온 냉수를 한 컵들이 마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겨우 눈물을 멈추었다. 그 와중에도 한 손은 유현의 옷자락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언니, 고마워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깍듯이 인사하는 소녀의 모습은 또래의 평범한 여자아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여태껏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서희는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당장 호칭부터도 어떤 걸 사용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결국 서희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별말씀을요. 어머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 모습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보던 동주가 배를 잡고 웃으며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서희는 당장 동주에게 꿀밤을 먹이며 대거리를 하고 싶었으나, 처음 뵙는 어르신 앞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냐아앙.”
설상가상으로 달려 나온 미호까지 소녀에게 달려가 머리를 비벼댔다. 지금 당장 누구에게 가장 잘 보여야 하는지 저 눈치 빠른 고양이는 바로 파악한 것이다. 게다가 저 녀석은 호칭을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서희는 천진하게 소녀의 품에서 재롱을 부리는 순돌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소녀가 울음을 그치고 잔뜩 부은 눈을 비비며 저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도담초등학교 3학년 정하윤입니다. 양시원 대감의 처이자 유현의 어미 입지요.”
하윤의 아찔한 자기소개를 들으며 서희는 멍한 기분을 느꼈다. 대감의 처니, 어미니…, 10살 소녀가 자기소개할 때 절대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도 소녀는 의젓하게 어머니로서 제 소임을 다했다.
“제 아들이 여러분께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막내로 자라 철이 없고 부족함 많은 아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윤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한참 이갈이 중인지 앞니 하나가 쏙 빠진 것이 보였다.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양 갈래머리와 쏙 빠진 앞니를 보고 있노라면 서희는 더더욱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머니, 어떻게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자식이 천 리 밖에 있더라도 부모는 제 자식 소리를 단번에 알아듣는 법이다.”
서희는 하윤의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언뜻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유현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천 리 밖에서 어느 날 제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했단 말씀이십니까?”
“그, 그건….”
유현이 걱정 섞인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다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평생을 제정신이 아닌 채 살 수도 있습니다.”
유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하윤은 그 표정을 보고 기적 따위로 대충 얼버무리려 했던 계획을 즉시 접었다. 아들을 찾은 기쁨에 들떠있었지만, 아들의 말대로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니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