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믿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최근 읽었던 글(누군가가 책에서 읽은 글을 정리한 글)에서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관계에서 믿음을 전제하여 살아간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밥을 먹고, 운전하고, 일하며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래서 기본적인 믿음을 깔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고차원적인 신뢰는 어떠할까. 소위 우리가 말하는 ‘믿을만한 사람’. 최근까지도 나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었다.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거나 마음을 주면 마음이 확 쏠려버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믿을만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게 꽤 까다로운 사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이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인간관계가 꽤 쉽게 틀어지는 편이라 고민이 많은 편이었는데,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믿음’ 때문이었다. 최근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믿음’이 있었다. 나를 믿은 상대의 실망, 혹은 내가 믿음을 준 상대에게 받은 실망, 상처.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으니 고등학교 때처럼 그냥 원초적인 호불호를 겉면에 드러내는 어리석음은 없다. 사이가 나빠지는 건 돌이켜보면 오히려 가까웠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정말 싫었고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싫어하게 된 건, 그에게 받은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요즘은 내가 그 사람을 참 많이 좋아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흔히들 말하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거. 나를 무시하고 싫어하려 했던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려보았다. 그는 나를 맹목적으로 신뢰했었다. 그래서 나에게 실망했던 순간, 제 믿음이 보답받지 못한 순간 누구보다 크게 돌아섰다. 나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결국 적당한 거리감을 둔 신뢰가 평탄한 인간관계의 답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증거로,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무난한 삶을 살아가는 내 배우자를 떠올린다. 그는 나하고만 싸운다. 한 때 이 사람은 왜 나한테만 이러는가, 내가 만만한가 싶어 또 싸운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내 배우자의 심줄을 건들 수 있는 건 나 정도인 거다. 그래서 우리는 또 싸우고, 화해하고, 더 믿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쉽고도 어려워서 적당히 믿고, 적당히 발을 빼고, 이어가는 능숙함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게 무탈한 일상의 답이다. 그런데, 그래도, 그리 엉망진창인 시간들을 굴러왔으면서도 믿을만한 사람을 찾고 싶어 한다. 그냥 아무 생각, 계산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관계와 사람을 찾는다. 경계심이 없는 순수한 믿음으로 연결된 사람 간의 교류가 주는 충만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생겨나는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또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부단히 찾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쉽사리 그를 믿을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전적으로 나를 믿는다는 것도 이전만큼 달갑지 않다. 믿음에 대한 이 모순된 감정이 잘 정의되고 정제된다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