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책 | 언더그라운드 2: 약속된 장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성을 결여한 말과 논리는 현실성을 내포한(그 때문에 불순물 하나하나를 무거운 돌처럼 질질 끌 수밖에 없는) 말과 논리보다 종종 강한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각각의 방향으로 갈라져버릴 것이다. (P. 33)
개중에는 옴진리교의 경험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신문 보도조차 안 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는 신문이고 뉴스고 아무것도 안 보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실패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겠죠. 그렇게 행동하면 또다시 똑같은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틀린 시험문제와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잘못 되었는지 끝까지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에도 또 똑같은 곳에서 실수를 저지를 테니까요. (P. 143)
그렇습니다. 절대귀의입니다. 편하다고 보면 편하죠. 그 사람들을 보자면, 하나같이 세계에 대한 ’이건 뭔가 이상하다‘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뭔가 이상하다‘는 게, 상자 속으로 들어가면 ’이건 카르다마‘라는 식으로 전부 말끔하게 설명이 되죠.
전부 말끔하게 설명이 되는 게 그 사람들한테는 중요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전부 설명이 되는 논리 따윈 절대 안 돼요. 우리 의견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통사람은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걸 좋아하게 마련이죠.
그렇죠 모두가 그런 걸 원합니다.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일반 미디어 같은 곳도 그렇죠.(P. 302-303)
고백하자면 이 책이 내게는 첫 하루키 책이다.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면 한 번쯤 거쳐 간다는 일본 문학 시기가 있는데, 나는 누가 뭐래도 요시모토 바나나와 온다 리쿠 파였다. 그러다 보니 내 안의 하루키에 대한 이미지는 주변에서 평하는 것에 좌우됐는데, 썩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다. 편견 속에서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의 책은 기대와 다르게 인상 깊었다. 그의 소설은 어떤지 몰라도 인터뷰를 엮은 이 책만큼은 그랬다.
앞서 밝혔던 것처럼 소설이 아니라 옴진리교에 속해있던 8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1편은 옴진리교 사린 사건의 피해자 인터뷰를 담았다면, 2편은 옴진리교에 속해있던, 어찌 보면 가해자의 인터뷰를 담은 셈이다. 인터뷰이인 신자의 배경, 조직에서의 위치, 사건에 개입된 정도와 교단에 가지고 있는 감정은 모두 상이하다. 하루키가 밝히기를, 1편과 다르게 2편에는 하루키의 의견이 어느 정도 개입이 되어있다고 한다. (나는 1편을 읽지 않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상대를 평가하기보다는 그저 그들의 모습 자체를 담으려고 했고, 비난이나 재평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밝힌다.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수의 관점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책을 읽기 전에 일부러 사린 사건에 대해 검색하지 않았다. 최대한 편견 없이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아는 것은 세기말,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지하철에서 사린이라는 독극물을 살포한 사건이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읽기 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옴진리교 신자’라면 보이는 전형성이 있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 유형이 보이는 듯했다. 세상 만물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이 자기의 논리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영역에 천착하기 쉬운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현생’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종교에 빠질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옴진리교에는 그런 전형적인 사람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혹시 나는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어떤 유형을 만들어내 그렇게 바라보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
그뿐만이 아니라 전형을 찾으려는 노력은 나와 그들을 분리하며 타자화하고자 하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자만감 같은 게 있었다. 기존에 믿던 종교도 있고, 영적인 면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편도 아니고…… 그러나 읽다 보니 과연 나도 옴진리교와 유사한 집단에 속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면 성찰을 많이 하고,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나의 특성상 어쩌면 그런 곳에 매혹되었을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전형화를 피하고자 했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이들은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스스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벗어나거나, 일반적인 공동체가 적합하지 않았거나, 사회‧경제적으로 부족했거나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가 있었다면 대안 공동체인 옴진리교가 이렇게까지 커졌을까?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이’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배제할 때 이들은 결국 암적인 영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이’를 벼랑에 몰아봤자 전체 사회에는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결과를 보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거슬리는 존재’만 깔끔하게 지워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일본의 세기말을 강타했던 한 종교의 이야기이지만, 과연 그때로부터 얼마나 변화했을까.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얼마나 다를까. 언제든지 옴진리교와 비슷한 존재는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