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의 읽고 싶은 책 | 호랑이가 눈뜰 때 (이윤하)
이 글을 보시는 분(이 계신다면) 중에 스타 트렉을 좋아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스타 트렉은 미국의 SF 미디어 프랜차이즈로, 1966년 TV 시리즈 제작을 시작으로 수많은 TV 시리즈, 영화, 게임 등의 작품이 탄생했다. 시리즈별로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먼 미래 가상의 우주를 항해하는 행성연방의 우주선 선원이 겪는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갑자기 스타 트렉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이윤하 작가의 "호랑이가 눈뜰 때"를 읽으며 이 스타 트렉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인공 ‘세빈’이 우주군 생도로 합격하며 시작한다. 동시에 세빈이 존경하던 선장인 삼촌이 반역자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스타 트렉(내가 본 시리즈는 스타 트렉 리부트 영화 시리즈다)의 시작 역시 커크가 전설적이었던 아버지의 길을 따라 생도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스타 트렉이 연상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요소가 녹아있다. 주인공인 ‘세빈’은 주황 호랑이 부족이고, 그가 탑승하게 된 우주군 전함의 이름은 ‘해태호’다. 이 외에도 구미호나 무당 같은 한국의 설화에 나올 법한 존재가 등장한다. 스타 트렉에서는 동양인이 술루 하나 정도 나왔는데, 여기서는 주인공으로 나오다니 너무나도 설렜다. 한편으로 그렇게나 동양인 가뭄이었던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술루를 ‘최애’로 좋아했던 내가 막상 이 장르에서 한국적인 요소를 접하니 어쩐지 어색했다. 스타 트렉에서 외계 종족이 나와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한국적 요소가 무심하게 등장하는 것에 어색해하다니, 내심 내 안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는 미국 장르라는 편견이 있던 것 같다.
등장인물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세빈은 이제 갓 생도가 되었지만 다른 어떤 등장인물보다 선장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특히 논바이너리 주인공은 굉장히 드문데 이 소설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세빈이 논바이너리임을 밝힌다. 사실 호랑이와 인간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인데, 그가 논바이너리라는 게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 안의 혐오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 떡잎부터 선장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세빈이 무척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책에 남는 아쉬움은 있다.
(여기서부터는 이 책의 중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빈은 주황 호랑이 부족 안에서 할머니로 대표되는 가모장 사회에 압박을 받으며 자랐다.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통제되는 엄격한 사회였고, 그게 주황 호랑이 부족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빈은 자신의 방식을 택했고,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비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세빈의 자발적 복종의 대상이 가족에서 군으로 옮겨왔는데, 세빈이 복종을 선택한 군이라는 조직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세빈 개인이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멋있었지만, 결국에 다시 군으로 종속되어 돌아오는 게 거북하게 느껴졌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친구들이 어느 정도 공유하는 감각이었다.
알고 보니 이 책은 3부작 중 하나의 책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모든 시리즈를 읽는다면 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하나의 장편소설만 바라보고 말하자면 특색 있는 캐릭터와 설정에 비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세계관은 매력 넘치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특히 동양인, 더 좁게는 한국인) 청소년에게 미국 중심의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닌, 한국이라는 배경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남겼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싶다. 나도 수많은 등장인물 중의 하나가 아닌, 주인공으로서 활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은 누군가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