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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은 존재하는가? 스패로

2025년 6월 여성작가의 책 | 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by 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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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말

그는 신앙심의 가장 먼 한계선을 발견했고, 그럼으로써 절망의 정확한 시작점을 찾아냈다. 바로 그 순간, 산도즈는 진정으로 신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웠다. (p.37)
그들을 내몬 것은 광기가 아니라 영원의 수학이었다. 신으로부터 격리되어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할 영혼들을 구제하여 신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짐도 너무 무겁지 않고 어떠한 대가도 지나치게 크지 않았다. (p.217)
“바로 그게 나의 딜레마요. 신은 나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한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여러분, 만약 내가 그 아름다움과 황홀함이 진짜라고 받아들인다면 나머지 일들 역시 신의 뜻일 수밖에 없다는 쓰디쓴 결론에 도달하오. 하지만 내가 단지 너무 많은 옛날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착각에 빠진 원숭이에 불과했다면 모든 일이 나 자신과 내 동료들의 책임일 뿐이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익살극이 되는 거지, 안 그렇소? 이런 상황에서 무신론을 견지한다면……” (중략)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원망할 수가 없소. 하지만 신이 사악하다고 믿기를 택한다면 최소한 나는 신을 증오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겠지.” (p. 629)

얼마 전 과학을 다루는 모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 과학자들도 신을 믿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만 과학에서의 신은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이라고 했다. 세상의 법칙 혹은 이치를 신이라고 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게 더 익숙한 신의 개념은 인격신이었다. 세상을 창조하고, 낙원에서 죄지은 인간을 추방하고, 타락한 자들에게 재앙을 내려 벌하고,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 인간의 죄를 사하게 하는 기독교의 신. 가톨릭 모태 신앙인으로서 지겹도록 듣고 살아온 말 중 하나는 ‘그분 뜻대로‘였다.

성경 구절에서도 이런 구절이 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며 한 말이다. 예수조차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데 한낱 신자야말로 주님의 뜻에 따르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어떤 것이 그분의 뜻이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 그러니까 나의 모친은 기후 위기도 가뭄도 홍수도 그분의 뜻이라 말씀하신다.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시험의 당락이나 차마 설명하기 어려운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는 것조차 그분의 뜻이라는 것이다. 문득 듣고 있자니 허무하고 허탈해지기도 하다. 어차피 모든 게 ‘그분의 뜻‘이라면 우리는 뭐 하러 열심히 살아야 할까? 그분의 뜻에 따라 이뤄질 일이라면 이뤄지고, 아닐 일은 어떻게 하더라도 이뤄지지 않을 텐데.


(여기서부터는 스패로의 중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에밀리오 산도즈는 예수회 신부이며, 동료들과 함께 우주에 탐사를 나갔다가 모든 동료를 잃고 홀로 돌아온다. 혈혈단신으로 돌아온 신부는 몸과 마음 모두 너덜너덜하게 찢긴 채 예수회의 조사를 받는다. 제법 두꺼운 이 책은 처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려주지 않는다. 산도즈가 돌아온 2060년과 처음 탐사를 나간 2019년을 오가는 전개 방식은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책을 붙잡게 한다.

처음 외계로 탐사를 나갈 때 산도즈는 이를 신의 뜻처럼 받아들였다. 천문대에서 외계의 신호를 식별하고, 탐사를 위해 하나둘 동료가 모이고, 절묘하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외계 종족과의 만남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그들의 언어를 익히고, 새로운 문명을 만났던 것 모두 어찌 보면 신의 뜻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희망으로 가득 찼던 이들 앞에 문화의 차이와 이에 대한 무지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하필 주인공이 신부인 것이 재미있다. 그만큼 이 책은 믿음에 관한 질문을 계속 던진다. (심지어 책 마지막에는 독자를 위한 질문 리스트까지 있다. 함께 이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한다면 활용하기 좋아 보인다.) 과연 이 모든 일, 탐사를 나간 것과 비극을 겪은 것까지 모두 ‘신’의 뜻일까? 만일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는 너무 잔혹하고 가차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 신이 없는가? 그렇다면 산도즈를 비롯한 이들은 왜 신의 뜻을 따르는 직업을 택했을까? 결국 이건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으로 독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과 신에 관해 재정의할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내렸던 답은 생각보다 내가 가진 신에 대한 정의가 냉소적이라는 것이었다. ‘신이 나를 이끌고 있고, 내 행동이 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기고자 하는 유혹’이 경계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유신론자고 신을 믿는다면 이런 유혹에 빠지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나의 행동이 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신의 생각은 인간으로서 추측할 수 있는 범위에 속할까? 결국 내게 들리는 음성은 신의 음성이라기보다 신의 음성이라 생각하는 나의 음성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삶이 너무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나는 신을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외적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사랑하는 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는 못하는, 모순된 생각을 가졌다. 어쩌면 산도즈처럼 희망을 품었다가 추락하는 게 두려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산도즈는 날아오르기는 했으니 말이다.

읽는 게 결코 쉬운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믿음에 대한 집요한 질문도 그렇고, 책의 두께도 전혀 얇지 않은 데다가 주인공은 한없이 큰 고통을 받는다. 행복한 장면이 나오면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다. 얼마나 밑바닥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행복한 장면을 보여주는 거야! (예상했던 것처럼 그 행복한 장면은 더 큰 추락을 위한 추진력일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독서의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책이기도 하다. 특히 외계 행성과 문화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너무 탄탄해서 진짜 존재할 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알고 보니 작가가 인류학자였다. 마치 스타 트렉과 같은 SF 영화라도 보는 느낌이다. 초판 발행이 1996년인데도 그때 예측한 미래와 현재는 제법 비슷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상상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후속편에서 산도즈는 다시 외계로 떠난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후속편이 번역되지는 않아 읽어볼 수는 없지만 하루빨리 후속편이 번역되기를 바란다. 그전까지 이 책은 내게 아직도 답하지 못할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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