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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고도 낯선, 냉장의 세계

2025년 8월의 읽고싶은 책 | 냉장의 세계 (니콜라 트윌리)

by 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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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값싸고 신선한 고기를 원했지만, 도시에서 행하는 대규모 도축에 따른 감각적 공포는 원하지 않았다. (p. 104)
오늘날 습식 숙성 소고기와 건식 숙성 소고기를 맛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목초지와 계절에 따라 젖소에게서 갓 짜낸 우유 맛이 다양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p. 336)
한마디로 우리의 식품 시스템 자체가 차가움에 의해 동상에 걸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경우 인간과 환경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을 최적화하기 위해 냉장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p. 411)




오늘 나는 냉장고 문을 몇 번이나 여닫았을까. 혹시 그걸 세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냉장고를 셀 수 없이 여닫는 나는 냉장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언가 사서 냉동실에 넣으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늘어나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고 착각하곤 한다. 나뿐만 아니라 냉장의 덕을 보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 냉장이 얼마나 우리 삶에 스며들었고, 우리를 바꿔 놓았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냉장 기술을 기반한 콜드 체인을 파헤치기 위해 냉동창고로 간다. 실제로 저자가 냉동창고에서 겪는 경험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흥미로웠다. 냉동창고에 머무르던 음식을 그렇게나 많이 소비하면서 정작 냉동창고 안을 보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과거에도 건조, 훈연, 발효와 같이 부패를 막기 위한 식품 보존 방법은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시도 끝에 마침내 차가움을 제어하는 데 성공하게 되자 이는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전 지구를 바꿔놓은 것이다. 우리는 이 기계식 냉장 냉동과 콜드 체인에 금세 익숙해졌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냉장고 자체의 등장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기계식 냉장이 바꾼 것은 단순히 무엇을 먹는지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계식 냉장을 통해 죽은 고기 유통이 가능해지며 소 사육 붐이 일어난다. 공장식 고기 해체 라인이 구축되고, 숙련 도축업자는 점점 사라진다. 대량 도축을 위해 동물에게 사료를 먹어 어린 동물을 도축한다. 저온 저장이 가능해지며, 제철 채소와 과일의 다양성 대신 저장하기 좋은 품종 위주로 재배한다. 심지어 바나나의 경우 그 결과로 한 품종만 심게 되어 곰팡이 병해가 들면 다 죽곤 한다. 수출, 수입 품목은 이전과 달라졌고 외국에서 식품 수입이 증가하자 대규모 재배자에게 유리한 구조가 고착된다. 이를 위해 수많은 냉동, 냉장창고가 건설되었음은 물론이다. 유통뿐만 아니라 가정용 냉장고의 도입으로 집의 구조, 여성의 노동, 로컬 마켓의 축소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삶 전반에 기계식 냉장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저자는 샅샅이 살핀다.

한 세기 안에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이 인공 겨울을 우리는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인류가 콜드 체인에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질 때가 왔음을 저자는 한 챕터를 고스란히 할애해 설명한다. 아마 처음부터 이 책의 여정을 따라온 사람에게는 놀라울 결말은 아닐 것이다. 은연중에 책의 전반에서 저자가 줄곧 하고 있었던 말이 마지막 챕터에서 드러난다. 인공적인 북극이 진짜 북극을 파괴하고 있다고. 그것을 마지막 챕터에서 구체화할 뿐, 사실 저자는 이미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결국, 또 기후위기’라고 넘기기에는 이것이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고, 지금 당장 던져야 할 질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전처럼 냉장고 문을 여닫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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