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의 읽고 싶은 책 | 샤덴프로이데 (나카노 노부코)
제삼자가 나서서 근거 없는 비난을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쾌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규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규탄하는 편에 서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자기 방어적인 의도도 숨어 있을 것이다. (p. 89)
보복의 위험을 감수할 정도이니 그 쾌감은 상당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얻으려고 일부러 사냥감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까지 싸잡아 '당신은 규칙을 어겼다.'라고 지적하고 제물로 삼는다. 그렇게 희생양이 선택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든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규칙을 어겼는지'를 따지기보다는 다수의 편에 서서 누군가를 처벌하는 쾌감에 취해 버린다. (p. 98)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우리 뇌가 도파민을 대량으로 방출해 만들어내는 쾌감은 섹스의 쾌락과 비슷하거나 더 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쾌락을 얻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누군가를 익명으로 비난하여 많은 사람의 찬동을 얻는 것이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 없는 대상에게 사회 정의를 집행함으로써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기쁨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효과가 클 뿐만 아니라 익명으로 행한 것이니 보복당할 위험도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정의 중독'에 빠진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는 이타적 징벌의 쾌락을 얻기 위해 규탄할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다. (p. 166)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최근 있었던 한 유튜버 겸 인플루언서의 짝퉁 논란 때문이었다. 나는 해당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고, 그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몰랐으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를 비난하는 글이 가득했다. 심지어 한 뉴스 매체에서 그의 소장품 전수 검증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나조차 질릴 지경이었다. 그의 잘잘못을 떠나 이 논란이 이렇게나 과열될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건 트위터를 비롯한 각종 익명 커뮤니티에서 익명성에 기대 못 할 말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였다. 이러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 되겠다 싶어 도서관 서가를 둘러 보던 중 이 책의 제목과 뒤표지에 있던 소개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을 끌어내리는 쾌감,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 정의 수호를 명분으로 행해지는 폭력.’ 이거야말로 내가 궁금하던 이야기가 아닌가.
독일인은 언어의 마술사임이 틀림없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도 이름을 붙이다니, 그들이 그만큼 세심한 것인지 아니면 온갖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인 ‘샤덴프로이데’는 누군가의 실패나 불행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 무심코 솟아나는 기쁜 감정을 뜻한다. 책 제목만 보면 거부감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뭔가 음습하고 찝찝하게 느껴지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살면서 이런 감정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샤덴프로이데’를 느끼고 잠시 내게 혐오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느낀 건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인간은 이런 찝찝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뇌과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저자는 이것을 뇌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애착 형성에 작용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친사회성을 강화한다. 아직 사회성을 배우지 못했던 아이가 성장하며 타인과 집단을 위해 행동하는 어른이 되는 것도 사회성을 배우며 친사회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 집단에 해를 끼칠 만한 개체를 색출하고 배제하며 타인을 제재하려 할 때다.
친사회성이 높아진 끝에 집단 균열을 배제하며 집단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이때, ‘악’(집단에 균열을 내는 존재)을 공격하여 타인에게 인정받으면서 우리의 뇌에는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한다. 도파민 분비는 엄청난 쾌감으로 돌아오고, 자기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이타적 징벌을 하게 한다. 그렇게 타인의 인정에 중독되다 보면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보다 타인을 징벌하는 행위를 위해 대상을 찾아다니기에 이른다. 게다가 요즘은 인터넷 익명성에 기대서 보복이라는 위험 요소마저 제거하고 타인을 단죄하며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저자는 각종 심리학 실험을 통해 그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의 뇌는 우리 생각보다 복잡한 사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마저 타인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욕구는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존재다. 누군가 익명성을 토대로 타인을 단죄하려는 일을 따져보지 않고 쉽게 찬동한다면 우리는 이타적인 징벌을 한다는 핑계로 ‘정의 중독’ 상태에 빠져 가장 얻기 쉬운 쾌감을 갈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는 어느 사람도 피해가기 어려운 유혹이다. 서로를 지키겠다는 좋은 의도가 과연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는 걸까? 우리는 항상 의심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우리가 편파적인 견해를 가지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편애하고, 다른 집단은 폄훼하는 태도가 인간이 살아남는 데 필요했던 요소일 수 있으며, 인간이란 싸움을 통해 살아남은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관해 물었을 때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라 답한 마가렛 미드를 떠올린다. 우리에게 호전적인 DNA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인류사의 많은 갈등을 이해하는 데는 필요하겠으나, 나는 그게 자칫하면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인류가 어떻게 호전적인 DNA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친 이를 보살피는 문명을 꽃피웠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우리는 타고난 대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