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의 읽고 싶은 책, 꿈꾸는 책들의 도시 (발터 뫼어스)
기억은 나를 슬프게 만드니까. 좋은 때의 기억이 나쁜 때의 기억보다 눈에서 더 많은 눈물을 자아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
네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써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너 자신으로부터 창조해낼 수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다.
“그냥 계속 기어올라가는 거다. 마치 소설을 쓸 때처럼. 처음에 아주 비약적으로 한 장면을 쓰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다가 언젠가 네가 피곤해져서 뒤를 돌아보면 아직 겨우 절반밖에는 쓰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앞을 바라보면 아직도 절반이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때 만약 용기를 잃으면 너는 실패하고 만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일을 끝내기는 어렵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제목은 사서로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책들의 도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만을 가지고 책장을 쉽게 넘기기에는 엄두가 안 나는 분량이기는 했다. 짧은 글을 읽는 데 익숙해진 나는 요즘 들어 긴 글에 집중하는 게 영 어려웠다. 종이책 기준으로 720쪽이고, ebook 기준으로 928쪽이었다.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이다. 걱정하며 읽기 시작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왜 이렇게 술술 잘 넘어가지? 나조차도 당황하면서 읽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미텐메츠라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책을 출간하지 않은 작가인데, 그는 대부 시인의 유언으로 한 전설적인 원고의 주인을 찾기 위해 부흐하임이라는 도시로 향한다. 원고 하나로 시작되는 미텐메츠의 모험을 함께 따라가는 여정을 담은 이 판타지 모험 소설은 방대한 세계관을 지녔지만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책은 마치 내가 미텐메츠와 이 모험을 함께 하는 것처럼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도 주먹을 꽉 쥐고 보게 되고, 가까스로 위기를 탈출할 때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쉴 만큼 몰입하게 한다.
책의 전체적인 톤은 마치 환상적인 동화 같지만, 생각보다 잔혹한 묘사도 있고 충격적인 반전도 있다. 평소라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요소일 텐데도, 이 책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과 잔혹한 묘사보다는 충격 자체에 집중하게 해서 그런지 처음 접했을 때 잔혹하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다시 천천히 곱씹어보니 제법 잔혹하고, 이게 시각적으로 단번에 들어오는 만화나 영화, 애니메이션이라면 나는 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상상을 한 번 거치는 활자여서 그런지 다행히 그 잔혹함에 집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이 재밌는 점이 하나 더 있다. 표지를 넘기면 제목 아래에 ‘발터 뫼르스가 차모니아어를 옮기고 삽화를 그림’이라고 적혀있다. 위에는 ‘차모니아 출신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장편소설’이라고 써있다. 즉, 본인이 쓴 책일텐데도 굳이 자신은 옮기기만 했을 뿐, 이 책의 주인공인 미텐메츠가 썼다는 설정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이게 하나의 설화처럼 보이게끔 해 결말까지 읽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정말 존재하는 이야기처럼 느끼게 한다. 더불어 작가의 유머감각과 컨셉에 지나치게 충실한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상이 펼쳐진다. 책 사냥꾼, 책 서적상, 작가, 비평가, 출판업자, 독자, 책과 관련된 모든 이가 등장한다. 적어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를 싫어하기는 힘들 듯하다. 심지어 작가가 창조한 이 세계에서 각 시대마다 어떤 책이 유행했는지조차 상세하게 설정이 있는데 감탄이 나올 따름이다. 이렇게 온전하게 책을 사랑하는, 책을 향한 헌정 같은 세계가 또 있을까? 그 세계에 푹 빠져 함께 여행하다 보면 어느새 그 두꺼웠던 책장은 다 넘어갔고, 나도 미텐메츠와 함께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울고 웃게 된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책 속을 여행하는 여행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