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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Oct 26. 2022

삶을 담보로 한 도박, 파친코

2022년 8월 여성작가의 책 | 파친코 (이민진)

책속의 말

“남자들은 우리 여자들하고는 다르게 선택을 할 수 있단다.” (p. 23)
노아는 아키코에게 자신이 몸소 습득한 불공평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키코는 자신이 그녀의 부모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테니까. 노아를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냥 조선인으로 보는 것이 나쁜 조선인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아키코는 노아의 인간성을 볼 수 없었다. 노아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조선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되고 싶었다. (p. 118)
인생에는 모욕적인 일과 상처받을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에쓰코는 자기에 국한된 것이나 자기가 꼭 치러야 하는 것만 챙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솔로몬이 받은 모욕을 가져와서 이미 수많은 굴욕으로 넘쳐나는 자신의 서류철에 끼워 넣고싶었다. (p. 250)




애플 드라마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 베스트셀러인데 판권 문제로 절판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도서, 그로 인해 부르는 게 값이었다는 책, 웬만한 도서관에서는 예약이 꽉 차있다는 그 “파친코”를 세 달의 기다림 끝에 읽게 되었다. 나 역시 절판 사태가 벌어지고나서 심각성을 깨닫고 도서관에 예약을 했는데, 처음에 대기 순서가 몇 번이었는지 까마득할 정도였다. (확실한 건 두 자리였다는 것.) 3개월을 기다려 마침내 읽게 된 책의 첫 구절은 강렬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개정판에서는 ‘망쳐 놨지만’이 ‘저버렸지만’으로 바뀌었고, 저자는 원문의 fail이 disappoint의 뜻에 가깝다고 밝혔지만 무엇이 되었든 이 첫 문장이 강렬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파친코”라는 책을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문장을 시작으로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권, 700페이지 남짓한 책에 양진-순자-노아와 모자수-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재일조선인 4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배경도 조선 영도부터 일본의 오사카, 도쿄, 요코하마, 나가노, 미국의 뉴욕을 오간다. 단 두 권인 책임에도 방대한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아우를 수 있던 것은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과감히 뛰어넘기도 하며 생동감 있는 시대의 변화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의 삶을 따라가며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작가는 4대에 걸친, 시간으로 따지면 100년에 가까운 세월 안에서 살아숨쉬는 듯 생생한 인물이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했다. 인물 사이 관계를 촘촘하고 섬세하게 직조한 방식은 주제가 전혀 다르지만, 예전에 읽은 “소녀, 여자,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가는 이 책을 준비하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섬세함이 이해가기도 하고, 동시에 30년을 준비한다고 모두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기에 놀랍기도 하다.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오게 된, 그리고 일본에 남게 된, 또는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재일조선인 4대가 일본에 갖는 감정이 모두 다르고, 일본에 사는 교포와 살지 않는 교포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포착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태어나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계 ‘피비’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매번 외국인 등록을 해야하는 상황에도 자신이 태어난 곳, 살아온 곳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솔로몬’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일본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우리가 일본을 싫다고 말하는 건 편할지 몰라도 그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온 이들이 일본에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기만 하다. 그런 그들이 전쟁에 패한 일본을 변호하려 드는 듯한 태도를 마냥 비난할 수 있을까?

‘역사가’ 그들을 ‘망쳐 놨지만’, 유독 여성에게는 더 가혹했다. 이 책에서 어느 한 명이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인물이 여럿 나오고, 조명되는 이도 그때마다 다르다. 그렇다해도 ‘순자’가 이 책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순자는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순자를 비롯한 여성 인물은 여자라는 이유로 지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엄밀히 말해 ‘순자’가 떠나와야 했던 이유부터가 여성이었기에, 순결한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작가가 단순히 여성의 고통을 전시하려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성 인물이 겪는 제각기의 비극은 그만큼 여성의 고통과 희생이 역사 속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려는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보다 부침이 많고,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쉬웠던 그 시대의 모습. 하지만 강인하게 삶을 부여잡고 이어나가야만 했던, 혹은 거기서 스러져 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인은 파친코 사업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생각하여 꺼렸지만 재일조선인에게는 그것이 몇 남지 않은 기회였다. 파친코처럼 일본인이 꺼리는 사업이 아니라면 조선인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자격을 갖추려 노력해도 그 리그에 끼지 못한다. 각종 부당한 이유로 차별해 재일조선인을 밀어내기 마련이니까. 옮긴이는 파친코 자체가 도박이라는 면에서 재일교포의 삶과 닮아있다고 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삶을 담보로 도박해야 하는 이들은 첫 문장처럼 역사가 그들을 저버렸지만, 살아남기 위해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기꺼이 자신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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