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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Nov 09. 2022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 엠마

2022년 9월 여성작가의 책 | 엠마 (제인 오스틴)

책속의 말

그녀는 몹시 창피하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속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부끄럽게도 스스로를 속였던 것이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날이 비참한 나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위안이나 마음의 평정 같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원천이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더 나은 행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다가오는 인생의 겨울철마다 활기와 명랑함이 그 이전보다 부족하더라도 더욱 이성적이고 스스로를 더 잘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서 그 계절이 지나갔을 때 후회할 일이 더 적어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을 가장 다정하게 사랑할 대상으로 삼으면서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았지."




‘앞으로 결혼할 생각이 거의 없다’라고 선언하는 당돌한 여자 주인공 엠마,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선생처럼 항상 곁에서 티격태격하는 남자 주인공 나이틀리, 엇갈리는 사랑의 작대기. “엠마”의 첫인상은 ‘로맨스 소설’ 그 자체였다. 작은 마을인 하이버리를 배경으로 흔히 로맨스 소설에서 분류하듯 여주, 남주, 서브 여주, 서브 남주에 들어맞는 등장인물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흥미진진한 로맨스 소설 말이다. 로맨스 소설의 ‘여주’ 역할인 엠마 우드하우스는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에서의 여성 주인공과 달리 돈도 많고 외적으로 부족할 게 하나 없는 여성 주인공이다. 그녀는 정작 본인은 ‘결혼할 마음이 없다’라고 선언하지만, 자만심에 넘쳐 마을의 남녀를 짝지어주는 데 재미를 붙였다. 나이틀리는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때로는 엠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세심하고 점잖은 남주다. 로맨스 소설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초반에 티격태격하던 두 등장인물이 후반부로 가면 서로 좋아하게 된다는 클리셰를 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엠마와 나이틀리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서로를 향한 감정과 태도가 변해간다. 독자에게는 보이지만, 둘은 미처 모르는 변화를 통해 우리는 결말을 추측해볼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엠마”로부터 200여 년이 흘러 정형화된 로맨스 플롯을 봐왔기에, 후대의 유산을 토대로 원전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정답지를 알고 시험을 풀기 시작한 기분이라 미묘하기는 하지만, 그 예측이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은 왜 엠마가 중매에 열광하게 됐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했다.

문제는 다 읽고 나서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말괄량이 같던 엠마가 나이틀리와 만남으로 현숙한 여성이 되는, 마치 나이틀리에게 종속되는 듯한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플롯과 다름없지 않나, 다소 불편한 마음으로 이 소설의 이면을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여성 문학 비평서를 읽고 있는데, 오스틴은 ‘숨기기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엠마”의 주인공인 엠마 우드하우스를 보며 쉽게 사랑하기 어려운 캐릭터라고 했다. 사실 나도 오스틴의 (번역된) 모든 작품을 읽고 좋아하면서도 “엠마”만큼은 읽으려다가 포기한 적이 많았다. 그건 엠마의 자만심 때문이었는데 독자가 볼 때는 뻔히 보이는 걸 엠마는 보지 못하고 결국 크게 후회할 행동을 하곤 한다. 하지만 엠마는 후회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진정으로 반성하며 변화하려 노력한다. 엠마의 이런 역동적인 변화는 이 소설의 첫인상이 로맨스 소설인 것과 다르게 엠마의 성장 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나는 오스틴이 숨겨놓은 것이 바로 이 ‘여자 주인공의 성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읽은 두 편의 논문이 있는데, 하나는 “감정, 계급, 영국성: 제인 오스틴의 『엠마』(김진아)”, 또 다른 하나는 “에마 우드하우스의 사회화: 분리에서 연합으로(조한선)”였다. 전자에서는 오스틴이 이 소설에서 ‘영국성’, 즉 영국적 상냥함을 강조하고 있다며 나이틀리가 대표적으로 영국적 상냥함을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이 이야기에서 엠마 또한 영국적 상냥함을 배우는 과정이었고, 이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했던 자기 모습에서 탈피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엠마가 나이틀리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라, 여성이 충분히 자기중심적일 수 있고, 그런 모습에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시대상에서 진보적인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후자에서는 자기중심적이었던 엠마가 어떻게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가는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에리히 프롬의 이론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나는 이 후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기에 그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은 본질상 미숙하고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든 인간은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결함은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일 것이다. 그렇다면, 에마는 “온갖 결함에도 불구하고 결함이 없다”(faultless in spite of all her faults)는 해설자의 해설은 타당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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