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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Dec 20. 2022

환상을 통해 현실을 바라볼 때,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2022년 12월의 읽고 싶은 책 |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김유정 외)

책속의 말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은진은 미래였다. 은진 또한 빠르게 시간 뒤로 밀려나 과거가 될 때까지는. 어쩔 도리 없이 흩어지는 우리는 가끔은 뜻하지 않게, 이렇게 필연적으로 연결되나 보다. 인간이라서. 
(용의 만화경)
모든 타인을 질투한다. 어떻게 해서든 남들에게서 부러운 점을 하나씩 찾아낸다. 남들한테 하듯이 나 자신에게도 너그러워 보자. 나한테는 좋은 점이 없나? 어쨌든 다달이 꼬박꼬박 꿀 빨면서 월급 루팡하고 있는 거? 미쳤다 진짜.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잘만 사는데 남들 보기에 별문제 없어 보이는 내가 왜 이래 대체. 
(어느 날, 잔멸치)
장갑들 중에서는 진짜 이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김 씨, 혹은 경남 댁, 포항 할매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거나 구청의 실수로 이름이 바뀌어 버리거나 다양한 이유로 이름이 감추어졌다. 진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갑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데스크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존재를 잃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장갑들은 가능성을 지닌 셈이었다.
(장갑들)




2022년 독서 모임의 마지막 책은 우리 모임에서 종종 그랬듯 사다리 타기를 통해 정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하나씩 골라 후보로 제시했고, 사다리를 그린 Y가 선택한 책이 마침 딱 걸렸는데, 처음에는 제목 때문에 잠시 주춤했다. ‘식인자들’이라니. 나는 공포, 좀비, 고어, 아무튼 이 비슷한 것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쫄보인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걱정하며 펼친 게 민망하게도 전혀, 그런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은 어반 판타지 문학 공모전 수상작과 브릿G 인기 단편 판타지 소설을 모은 책이다. 딱히 특정 주제로 모은 단편이 아니라 판타지라는 것 외에는 딱히 주제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장르 외에도 나름대로 엮어보자면 충분히 엮을 수 있는 작품이 많다. 역사의 아픈 상처를 드러낸 작품만 해도 「용의 만화경」과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다수파」가 있을 것이고, 현실의 차별과 그 시대의 약자를 조명한 작품으로 보면 「라오상하의 식인자들」과 「장갑들」을 연결 지을 수 있겠다. 아마 ‘판타지’라는 장르가 갖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는 현실에서 벗어난 배경에서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현실의 문제점을 바라볼 수 있다. 현실의 문제가 현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해결되는 가상의 세계를 봄으로써,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혹은 그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고통받는 이에게는 이게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법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판타지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도함으로써 말이다. 현실에서 설령 ‘다정한 판타지’가 실현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시도를 한 자체가 다정한 마음 그 자체니까.

워낙 다양한 색의 단편이 수록된 책이라 어느 하나만 언급하기에는 아쉬워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세 편을 얘기하고 싶다. (순서는 책의 목차를 따른다.) 

맨 처음을 장식한 「용의 만화경」은 표현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글이었다. 글 자체가 마치 만화경을 보는 것처럼, 채도와 명도가 높은 색이 반짝이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는 듯하다. ‘용’이라는 인외 존재를 제시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이고, 인외 존재란 무엇인가 탐구하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글이다.

두 번째로 「장갑들」은 이름이 제대로 불리지 않는 여성들(‘김 씨, 혹은 경남댁, 포항 할매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거나 구청의 실수로 이름이 바뀌어 버리거나 다양한 이유로 이름이 감추어졌다.’)의 이미지를 완전히 전복한 글이었다. 장갑과 구두굽이 대립하는 이 세계에서 선과 악은 명확하지 않다. 구두굽이라고 해서 언제나 구두굽이고 장갑이라고 해서 언제나 장갑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장갑은 누군가의 손을 잡는 상징이고, 구두는 짓밟는 자의 상징처럼 보인다.

「다수파」는 왜 이 글이 마지막에 자리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다 읽고 나서는 마음이 묵직해진다. 세월호 이야기라서만은 아니다. 하필 희생된 아이의 이름이 ‘나라’라서도 아니다. 우리는 또 비슷한 일을 맞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하는 의견이 언제나 다수가 되는 ‘다수파’ 아버지가 지긋지긋하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다수의 의견이 되었다. 원인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혀내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보다 무관심이 늘어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정확히 그 순간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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