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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Dec 25. 2022

크리스마스니까 괜찮아, 12월의 어느 날

2022년 12월의 여성 작가 책 | 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책속의 말

불굴의 부모가 쌓은 견고한 토대에 있다가, 부모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함을 깨달은,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필요로 하는 모래 늪으로 옮겨간 한 발짝. 내 세상이 그 늪을 만나 기우뚱 주저앉았다.
그가 버는 돈은 가족을 부양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반면, 내 수입은 내 앞가림만 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고 내 일은 직업보다는 취미에 가깝다는 듯이, 내 소망에 대한 어떠한 존중도 없이,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는 거다. 




나는 보통 읽을 책을 신중히 고르는 편이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책의 정보를 간단하게 확인해본다거나, 앞표지와 뒤표지에 적힌 홍보문구를 유심히 읽어본다거나 하는 정도다. 보통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 고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은 “12월의 어느 날”이라는 제목 하나 때문에 읽게된 책이다. 어떤 내용인지, 작가가 누구인지, 장르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고른 책치고 첫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겨울철 대중교통 이용자들이 죄다 병균 과적으로 쓰러지거나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배경이 영국인 걸 보고 영국식 시니컬한 코미디인가,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였잖아.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돌아간다. 크리스마스에 탔던 버스에서 우연히 어떤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주인공 로리. 몇 달간 열심히 그를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운명의 장난인지 절친인 세라의 남친으로 그 남자, 잭과 재회하게 된 로리. 서로에게 끌리지만, 절친의 연인이기에 멀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모든 걸 잊기 위해 태국으로 여행 간 로리는 새로운 사랑인 오스카를 만나나 했지만, 잭에게 불운이 닥치는데… 새로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오스카와도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이북 기준 620페이지 안에 약 10년에 걸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야기에서 다루는 시간의 범위도 제법 길고, 실제 책의 분량 자체도 짧지 않은 편이다. 다 읽고 드는 생각은… 굳이 이렇게 길어야 하나? 재미가 없다는 게 아니다. 길어도 소설이고, 문체는 난해하지 않고 친숙하다. 갈등이 지나치게 깊거나 무겁진 않아서 빠르게 읽힌다. 그런데 마지막에 힘이 빠져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야 하는데 서둘러 마무리지은 느낌이 강했다. 대체 뭘 위한 10년이었던 걸까.

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평소라면 발휘되지도 않는 현실감각이 자꾸만 불쑥 올라왔을 뿐. SF에는 과몰입할 수 있으면 로맨스에는 이입하기 힘들어하는 탓이다. 어떻게 한순간에 반해서 계속 그 상대를 찾아다니지? 근본적인 의문이 머리를 떠돌았는데, 작가 소개를 읽고 반성했다. 작가가 스물두 살 생일에 자신이 발을 밟은 남자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고 한다. 그래, 내가 너무 세상을 내 기준대로 해석하려고 했던 거다. 그리고 원래 크리스마스에는 이런 사랑 이야기에 관대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 책은 책보다는 넷플릭스 크리스마스용 영화였으면 적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러닝타임은 1시간 30분에서 1시간 40분, 아무리 길어도 2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 예쁘고 잘생긴(그리고 그렇게나 크리스마스용 음식을 먹는데도 살은 찌지 않는) 배우로 캐스팅해서 (로리는 주이 디샤넬 느낌의 배우면 좋겠다.) 크리스마스에 피자든 뭐든 먹으면서 본 다음 크리스마스용 영화였어~ 하고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볼 거 없으면 배경음악으로 틀 게 되는, 그런 영화였으면 지금보다는 더 즐길 수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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