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의 지금 나의 관심사 |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영화나 드라마를 빨리 감기로 보는 데는 거부감을 느끼면서 뉴스나 정보 프로그램은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도 많다. 전자를 ‘예술 감상’, 후자를 ‘정보 수집’이라고 구분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나 드라마도 정보 수집 대상이라고 여기면 빨리 감기를 하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면식도 없는 프로들이 미지근한 감상이나 얕은 지식에 대해 가차 없이 팩트 폭격을 가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소위 말하는 ‘인터넷 경찰’인 셈이다. 특히 트위터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인 찐(진짜) 오타쿠가 짝퉁을 철저히 무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10대부터 SNS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봐온 Z세대가 전쟁터 같은 트위터에 일종의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범접할 수 없는 비판이 공개적으로 오가는 오타쿠 문화에 발조차 들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즉 비판이나 지적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이는 언뜻 보기에 ‘타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행위가 결여되어 있다. 관용이 아니라 단지 연결을 피하는 것뿐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과는 생각이 다른 ‘타자’의 존재를 마음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의견에 부딪혔을 때 ‘당신과 저는 의견이 다르군요’로 끝내지 못한다.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내성이 없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흘려보내지 못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쾌하다’며 곧장 비명을 지른다. 이는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일종의 좁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에서 생각보다 자주 나누게 되는 대화가 있다.
동료: "더 글로리" 보셨어요?
나: 아뇨, 그거 재밌다던데.
동료: 진짜 재밌어요!
저 "더 글로리"에 다른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넣어도 성립한다. 나는 "더 글로리"도 "오징어 게임"도 "피지컬 100"도 "환승연애"도 안 봤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구독을 하지 않느냐고? 요즘 같은 시대에 OTT를 구독 안 하는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나는 넷플릭스, 왓챠, 심지어 디즈니플러스까지 구독하고 있다. 볼 환경은 구축되어 있으나 새로운 작품을 틀고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나는 기력이 부족하다. 대체 다들 어떻게 OTT에서 유행하는 콘텐츠를 전부 섭렵할 수 있는 걸까? 사실 나의 하루만 24시간이고 다른 사람은 48시간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최근에 이유 중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주변에서 이제 2배속 아니면 답답해서 못 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는 놀랐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빨리 감기' 해서 볼 생각을 해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배속을 조정하거나 장면을 건너뛰고 드라마나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면 작품을 '온전히' 즐길 수 없지 않나? 대체 왜 그렇게 보는 걸까? 궁금했던 찰나 이 책을 발견했고, 어느 정도 내 의문이 해소되었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 '감상에서 소비로'에서 OTT 시대가 열리며 수많은 콘텐츠가 넘쳐나자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양상으로 변화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감상이 예술로서 작품을 받아들이는 거라면, 소비는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빠르게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일상 대화 주제를 캐치업 하기 위한 것이다. 2장 '대사로 전부 설명해주길 바라는 사람들'에서는 대사를 통해 직설적으로 상황이나 감정선 등을 설명해주는 작품이 증가하는 현상과 그 원인, 해결 방안을 다룬다. 빨리 감기로 보니 행간을 해석하기보다는 대사로 설명해주는 편이 이해하기 쉽다. 더불어 SNS의 발달로 누구나 감상을 쓸 수가 있어 개인의 의견을 내기 손쉬워진 상황에서, 좋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모르겠다'라고 비판하는 게 근거도 필요 없고 동의를 얻기 쉽다. 이러한 의견이 작가에게 댓글 등으로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시스템이다 보니 그 피드백으로 '더 쉽게' 만들게 된다.
3장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서 빨리 감기로 시청하게 되는 이유에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 SNS에 수시로 접속하는 성향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전에는 물리적인 공간에서만 친구를 만났다면, 현재는 메신저, SNS에서 만날 수 있어 언제든 어디서든 동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러다 보니 빨리 감기를 해서라도 친구가 보는 콘텐츠를 보고 대화에 끼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이전 세대에 비해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가성비' 좋게 모든 걸 해결하고 싶다. 괜히 재미없는 콘텐츠를 보며 초래할 시간 낭비가 두렵고, 내 기분이 상할 게 두렵다.
4장 '좋아하는 것을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서는 '쾌락주의'라는 관점에서 빨리 감기 시청의 원인을 고찰한다. 이전까지는 작품 단위로 좋고 싫음을 판단했다면 빨리 감기의 시대인 요즘은 장면, 감정 단위로 좋고 싫음을 따진다. 마음에 여유가 없을수록 작품에서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비용 대비 최대한의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인 빨리 감기를 통해 시청자는 '작품 감상자'보다는 스스로를 '콘텐츠 소비자'로 정체화한다. 게다가 인터넷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도록 최적화된 미디어다. 문제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타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점점 나와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내성이 없어진다.
이게 과연 개인만의 문제일까? 5장 '무관심한 고객들'에서는 분명 작품의 공급자 측에서도 주도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화관에서만 상영할 때보다 텔레비전 방영권, 영상 배급권 등을 판매하는 편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 애초에 OTT에서 배속재생 기능을 제공하는데,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작가는 책을 마치며 빨리 감기는 결국 시대적 필연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눈 독서 모임 멤버들 또한 빨리 감기는 현상 중 하나일 뿐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책을 통해 빨리 감기로 보게 되는 시대적 배경과 외적, 내적 요인을 알게 되었고, 상당 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충분히 이해도 갔지만 여전히 영화나 드라마를 빨리 감기로 본다는 것에 거부감이 이는 것은 사실이다. OTT 시대에 태어난 게 아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명절 때나 특선 영화를 볼 수 있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적응이 안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빨리 감기로 보느니 그냥 보지 않겠다는 내 심보도 있고, 이제는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는 환경에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책을 덮으며 나는 마지막 작가의 말처럼 중얼거리게 된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