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단상
학교에서 데려가는 여행이나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 아닌, 직접 비행기를 예매해 떠난 여행은 18살이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여행을 갈 수 있었는지, 사실 기억이 잘 안난다. 받았던 장학금을 핑계로 친구 두 명과 방학을 이용해 도쿄를 다녀왔는데, 정말 느닷없이 간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했을 때 그 여행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캐리어에 소위 ‘가보시 힐’이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나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7-8cm 정도의 힐이 있었고, 그것을 신고 여행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씩 짧은 치마에 그 힐을 신고 예쁘게 화장을 한 채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건 당시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큰 일탈이었다. 이것은 분명 수 많은 이들이 ‘학생 때 하지말라는 화장은 그렇게 하면서 이제와서 무슨 탈코르셋 타령이냐’는 주장의 뒷받침이 되는 분류의 일화다.
자유가 억압된 청소년기. 한국 사회가 더 일그러진 코르셋으로 점철된 이유가 나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나이가 들수록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나 많아짐과 동시에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된다. 나 역시 그랬고, 내 친구들 또한 그랬다. 명문대에 가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선생님들의 말은 아침부터 자정까지 뇌리에 박혔다. 내 모의고사 백분위가 높아질수록 그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나와 친구들이 며칠간의 여행에서 하이힐을 챙겼던 것은 여성들에게 으레 채워지는 코르셋의 발현임과 동시에 이러한 체제에 대한 반기였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건 분명한 저항이었다. (그 행동들을 정당화시키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찰나의 일탈에서 우리는 분명 행복했다. 내 친구는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을 매일 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재밌었으니까.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파리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 때의 기억들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사대주의적인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분명 한국의 것과 달랐다. 사회가 인위적으로 부여한 여성성의 모습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획일적인 미의 기준이 나열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모든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일말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한국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가끔씩 서울의 지하철에서 흔들리다보면 한 구멍에서 나온 복제인간의 무리 중 하나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만연한 코르셋 강요와 높은 대학만을 위한 강요. 2018년 한국에 페미니즘과 탈코르셋이라는 의제가 폭발적으로 터졌던 큰 이유를 내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스위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