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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Sol Mar 02. 2019

Yesterday, when I was young

까치 유랑단의 여행


집에 들인 지 십 년은 넘었고, 안 입은 지 6-7년은 족히 된 낡은 경량 패딩과 동묘에서 샀던 후드 집업, 그리고 역시 구입한 지 몇 년이 흐른 점퍼. 여행길 짐에 세 아우터를 전부 챙겼다. 과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출발 전, 여행 도시 간 최저기온과 최고기온의 차이가 30도를 상회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옷을 싸는데 무척 골머리를 썩혔다. 프랑스는 가을이고, 스위스는 눈밭이고, 포르투갈에서는 초여름 날씨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옷장에 걸려있는지도 몰랐던 경량 패딩과 점퍼, 후드 집업을 껴입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 패딩과 동묘 후드는 여러 도시를 배회하다 결국 마지막 짐 싸기 단계에서 배낭 안으로 들어갔다. 고생이 많았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물론 동묘 후드는 산지 몇 달 안됐지만 만원이기 때문에 넘어가고, 두 가지 겉옷 모두 꽤 오래된 옷이라 여행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들은 손이 부족하면 길바닥에 내팽개쳐지기도 했고, 배낭에 구겨져 들어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괜찮았다. 저들의 내구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풍파를 겪도록 내버려두었다. 때문에 이번 여행은 옷에 대해 불필요한 걱정을 하거나 신경 쓸 요소가 전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성공한 여행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이렇게 홀가분하게 다녔던 적이 없었으므로.

이번 여행의 동행인 역시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어떻게 친구가 된 지 기억도 안나는 오래된 사이에, 이제는 ‘쌩얼’에 민망해할 사이도 아니게 된 여행 친구는 그 자체로도 편안함을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로 머리에 얹어진 까치집을 보고 놀리기 바빴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편안함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었다. 내 외관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신경 쓸 일이 없다는 것.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따위의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사실 동행인이 있으면 맨 얼굴, 샤워 등 여행지 숙소에서 눈치가 보이기 마련인데.) 심지어 가족 앞에서도 그 정도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하지 못하는데 이쯤 되면 이 친구가 지금 이 시점에 내 가장 밑바닥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 콘텐츠와 별개로, 늘 가고 싶어 했던 여행이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여행 앞에 ‘유럽’이라는 단어가 달린 여행을 선망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고 싶다고 해서 다음 달에 가자!라고 떠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선망은 현실이 되었고, 지금은 그 현실의 끝마침을 알리는 비행기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위에 적었던 나의 성장은 비단 유튜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이름을 걸고 열었던 전시들, 숱한 영상 협업, 외주, 기업 연계 영상들. 작년에 지나왔던 길들이 지금 나를 이 비행기 위에 올렸다.

얼마 전 ‘재능이 아까우니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재능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속으로 삼켰다. 재능이 뭐길래. 아까운 재능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은 것들을 배웠다. 시작은 피아노였다. 여느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듯, 나 역시 피아노 학원에 앉아 쇼팽을 쳤다. 쇼팽이 연주되던 건반은 이내 미술학원의 18호 붓이 됐고, 바이올린의 활이 됐고 수능 샤프가 됐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것들은 늘 지루했지만 나는 늘 어딘가에 묶여있었다. 피아노를 친 횟수는 대게 거짓말로 채워졌고, 미술학원에서는 늘 밑그림은 잘 그려놓고 채색을 대충 한다며 혼이 났다. 이젤 앞에 앉기 싫어 불평하다가 된통 혼나고 학원 한가운데에서 대성통곡했던 기억도 있다. 버티고 버티가 오 년정도를 배우고 그만뒀다.

그 변화들이 존재하는 궤적 안에서 숱한 분열이 있었다. ‘내가 대체 잘하는 게 뭘까. 나는 왜 이렇게 어중이떠중이처럼 이것저것 배우기만 하고 제대로, 확실히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걸까.’ 늘 괴로워했다. 그런 분열의 끝에 나는 수능을 봤고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분열의 연속이었다. 여성 혐오라고 명명되는 것인지도 몰랐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나를 덮쳤고 늘 불안한 의구심 속을 헤맸다. 선택 가능한 갈래는 많았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대학원도, 명성 있는 기업 인턴도, 전부 내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Yesterday, when I was young.
어제의 나는 오늘보다 어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5분 전의 나 역시 지금의 나보다 어리다. 이건 내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내 갈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이 시점, 시간은 반드시 내 편이다. 지금의 나는 오래된 나의 조각들이 채우고 있는 나 자신이다. 이 오래된 것들은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하다. 알고 있고 더 배울 것들을 조립하는 것은 ‘앞으로’ 해 나갈 일들이다. 계속해나가는 것은 힘이 된다. 그리고 그 길에 믿을만한 그리고 편안한 동료가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궤적의 완성이다. 이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이제 상상할 수 없다.

-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 기간 동안 많은 배려를 해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덧붙임) 여행을 하는 동안 단순한 여행지의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여행과 비교해 내가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게으른 탓에 많은 글을 쓰지는 못했지만,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2019.03.02/08:1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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