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 드러나는 계절.

by librehee

진정한 러너들만 살아남아 달린다는 계절.

겨울이 왔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힘들어

몇 번을 달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눈이 라도 오는 날엔 달리고 싶다는 열정과

넘어지는 건 아닌지 염려하는 마음이 동시에 싸운다.


눈이 내린 다음날.

날이 조금 풀린 것 같아 달려보기로 했다.

바람이 차니 히트텍부터 바람막이까지

겹쳐서 입고, 마스크로 호흡기와 얼굴을

보호했다. 골전도 이어폰을 끼고 장갑까지

야무지게 착용하면 준비 끝.

나가기 전엔 오버하지 말자고 다독인다.

위험할 것 같으면 조금만 달리고 돌아오자고.


앞쪽은 많이 녹아서 길이 보일 정도로 깨끗하지만

천변은 그렇지 않았다. 덜 녹아서 슬러시처럼

눈이 질척거리는 구간, 얼음이 그대로인 곳,

많이 녹아서 깔끔한 곳으로 나뉘어 여러 가지

코스가 있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천천히 달려야 한다.

보폭을 넓게 해서도 안되며 조금은 웃기게

보일지라도 종종걸음으로 총총 움직이는 게

최고다. 종종 거리며 달린다고 쉬운 건 아니다.

넘어지지 않게 바닥도 보고 몸을 지탱하려면

힘이 전체적으로 들어간다.


깔끔한 길에서는 원래 속도대로 달렸다가

미끄러울 때는 속도를 줄였다가,

자연스럽게 인터벌 훈련을 하게 된다.

3km 구간이라는 안내가 나오면

귀는 차가운데 얼굴엔 땀이 나고 몸 내부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러다가 강풍이 잠깐이라도 스쳐 지나가면

노천탕에 있는 듯하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처럼 재미있다.

속도를 줄여서 달리다 보니 중간에 주변 풍경을

구경하기도 한다. 물론 넘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중간중간 얼음이 떠다니는 강도 보이고

한가롭게 무리 지어 있는 고니 떼도 바라본다.

모든 풀빛들과 푸르름이 사라진 자리에

갈색빛 줄기들과 모든 걸 벗어던진 본모습들이

남아있다.

겨울은 무언가 떠나고 황폐해지는 계절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다.

군더더기가 모두 사라져 본질만이 남는 계절이다.

모든 걸 벗어던진 나는 어떠한 모습일까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올곧게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는

어떤 걸 덜어내야 하고 어떤 걸 담아야 할까.

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달리는 동안

계속 생겼지만 어렵거나 무겁지 않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시간을 준 러닝에게

고마울 뿐이다.


계속 달리다 보니 가장 좋아하는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처까지 신나게 갔는데 길에 얼음이 꽝꽝 얼어서

도저히 갈 수 없어 보였다. 아쉽지만 바로 앞에서

돌아오기로 했다.


겨울에는 중간에 걷게 되면 체온이
급격하게 식으며 감기에 걸릴 수 있다.
쉬지 않고 집까지 달려와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도 갈 때처럼

총총, 종종거리며 뛰고 구경도 하며 마무리했다.

달린 후 핫초코를 마시며 이 글을 정리하는
지금. 노곤노곤함과 추위에 지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내 주위를 맴돈다.

겨울 달리기! 쉽지 않다.
그래도 그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새, 바람 그리고 풍경이 있고 그때만 느끼는 체온변화, 생각들이 있다.

엄청난 폭설과 이어지는 강풍만 아니라면
이번 겨울도 꾸준히 달리며 계절 속에
푹 빠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