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왜 하필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
이 질문은 한국에서 왜 뮤지컬이 인기가 많은가라는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상업적 관점의 질문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뮤지컬이라는 연극적 양식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다.
상업적 성공이 중요한 제작자들에게 왜 대사극보다는 뮤지컬을 제작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어렵지 않다. 대사극보다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당연히 수익성도 대사극보다는 더 낫다. (물론 제작자들이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려는 의지를 단순히 돈만을 위해서라고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나중에, 제작에 대해 논할 때 함께 풀어가기로 하자.) 경제적 손익 관점으로 보면 관객이 뮤지컬을 선호하는 이유는 제작자들과의 그것과는 다르다. 제작자들은 공급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얻지만 관객은 수요 욕구를 경제적 지출을 통해 채운다. 관객은 일반적으로 대사극보다는 그 입장료가 더 비싼 뮤지컬을 위해 기꺼이 돈을 쓴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이 뮤지컬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왜 하필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라는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조금은 긴 산책로를 걸어가 보자.
위의 질문에 앞서 이 질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뮤지컬은 십수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기가 꾸준하게 올라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대사극보다는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래와 춤이 있어서 대사극 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뮤지컬이 아닌 연극에도 그 안에 노래와 춤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뮤지컬에서는 극적 진행에 있어서 음악의 기능이 적극적으로 강조된 모습을 가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노래방 업소의 조그마한 방에서 반주가 나오는 기계를 틀어놓고 그렇게도 신나게 놀 수가 없다. 노래 부르며 춤추며 우리는 이렇게 신나게 노는 민족이라고 술에 취해 크게 소리친다. 그러나 노래방 문화는 진정한 우리의 춤과 노래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증명일 뿐이다.)
하지만 세계의 그 어떤 민족이 춤과 노래를 즐기지 않을까? 춤과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은 자신만의 독특한 춤과 노래가 있다. 그 즐기는 방법과 모양이 다를 뿐이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춤과 노래를 즐긴다는 자신감은 우물 안 개구리의 자만심일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이 분명히 춤과 노래를 즐기지만 그 자체를 강조하기보다는 얼마나 독특한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를 비즈니스로 승화시킨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책이 있다. (손대현 편저, ‘문화를 비즈니스로 승화시킨 엔터테인먼트 산업’, 서울, 김영사, 2004) 이 책은 열다섯 명의 ‘세계 최초의 엔터테인먼트 최고 경영자 과정(THE EEP) 강사들이 직접 집필한’ 책이라고 겉표지에 소개되고 있다. 이 책의 1장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발전과 한국문화와의 관계’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고 그중 첫 번째 글에서 네 번째 글은 손대현이 쓴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한국적 풍류 유산’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의 주 내용은 우리 민족이 가지는 고유한 정신들의 강조와 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다. 같은 한국인이 읽기에 그리 이해하지 못할 사상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그러한 결론을 내어놓기 위해 서술한 논리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 저자는 그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호모루덴스』의 작가 호이징하가 ‘놀이 정신’을 강조하였다면 우리의 선조는 한 차원 높은 ‘풍류도’를 남겼다.”
책을 통해 제시된 내용만으로는 우리의 풍류도가 다른 민족의 고유한 놀이 정신보다 한 차원 높다는 이유를 사실 잘 모르겠다. 우리 고유문화에 대해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우리 민족만이 가진 고유한 문화들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풍류도가 왜 한 차원 높은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대현이 언급한 그 책 ‘호모루덴스’...
네덜란드의 학자인 호이징하(J. Huizinga)가 ‘놀이하는 인간’ 또는 ‘유희의 인간’이라고 뜻의 『호모루덴스(Homo Ludens-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김윤수 번역, 도서출판 까치, 1993)라는 책을 통해 전체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삶의 모습에 놀이와 같은 형식을 부여하고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손대현은 우리 민족의 풍류도가 그 놀이 정신을 넘어선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호이징하의 이론은 손대현이 말하는 우리의 풍류도 역시 놀이 정신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포괄적인 이론이다. 우리 민족이 가진 고유의 전통문화와 정신이 분명히 독특하고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가진 전통과 문화 그리고 정신보다 월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상징 인류학의 창안자이자 공연 인류학 탄생에 이바지한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그가 쓴 책『제의에서 연극으로(From Ritual to Theatre: The Human Seriousness of Play)』(이기우/김익두 번역, 현대미학사, 1996)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문화적 체험들을, 즉 공연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방적인 근본 형식과 같은 어떤 것에로 함께 되돌아갈 수 있는 다양한 ‘객관화된 마음의 형식들’을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만일 권력과 이익의 관심사들에 대한 고의적인 상호 오해를 계속해서 조장할 경우에 틀림없이 당면하게 될 파괴로부터 벗어나는, 인류를 위한 하나의 작은 발걸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즉 문화적으로 전달되는 다른 민족들의 연기와 공연을 통해서, 문자를 가진 민족들뿐만 아니라 문자를 갖지 못한 민족들에 관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번역 자체의 문제인지 빅터 터너가 원래 그렇게 어렵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빅터 터너가 공연 예술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내가 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공연 예술에 대한 이론으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뮤지컬은 공연 예술이고 춤과 노래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렇게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화의 우수성은 이미 우리가 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모른다. 알더라도 우리가 다른 소수민족의 우수성을 알고 있는 정도만큼만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우수성과 함께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우수성도 인정해야 한다. 만일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우수성을 잘 모른다면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일 뿐이고, 만일 알면서도 우리가 더 우수하다고만 자부한다면 빅터 터너가 경고한 권력과 이익을 위한 고의적인 오해를 조장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뿐이다. 우리 민족이 가지는 고유한 정신들을 강조하며 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을 하면서 그 고유한 정신이 풍류도라는 것인데, 나는 반드시 그것을 토대로 해야 동시대의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결과물이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만이 유난히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것들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수하다고 억지 논리를 펴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저마다의 춤과 노래를 가지고 있고 좋아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왜 한국에서 요즘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지는 다른 이유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