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운은 그가 쓴 책 『연극 감상법』(대원사, 1997)에서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뮤지컬이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그 이유를 단순히 우리나라 관객들이 생태적으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소박하기까지 하다. 뮤지컬은 우선 자본주의의 시대와 떨어질 수 없는 예술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예술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빨리 가는, 그 속도감에 있다. 정상적인 속도에 가속도를 더하기, 남보다 앞서가기, 유행에 뒤지지 않기 등. 앞에서 말한 뮤지컬의 빠른 속도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비정상의 속도이다... (중략)... 뮤지컬은 정상적인 속도에 가속도를 더한 비정상적인 속도의 장르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정상적인 우리 삶의 속도에서 이탈되어 있다. 뮤지컬을 일컬어 경박하고, 치졸하고 안이하고 선정적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뮤지컬은 통속적이고 상품화되고 역사의 진행 속에서 늦거나 주춤거린다.” 안치운은 그가 쓴 다른 책, 『공연예술과 실제 비평』(문학과 지성사, 1993) 『연극 읽기와 연극제도』(문학과 지성사, 1996)에서도 뮤지컬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한다.
나는 뮤지컬 작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뮤지컬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연극인으로서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늘 고심했다. 그가 지적한 문제를 뮤지컬이 가진 매력으로 덮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연극 감상법』이라는 책이 출간된 해는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넘은 1997년이다. 그 이후에 한국 뮤지컬의 판도는 많이 바뀌었지만 그의 문제제기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닮은 연극인 뮤지컬에 대한 뮤지컬계 사람들의 진지한 고민과 실천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라는 질문.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순진한 판단 때문이라면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나 나라에서는 아메리칸 뮤지컬 역시 인기가 높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까닭은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상업적 관점으로 본 해석을 통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의 강점시기, 한국의 분단, 그리고 냉전을 지나면서 한국이 받은 미국의 영향, 그리고 미국의 문화와 미국적 사고방식을 전달한 유학파 인사들과 기득권 계층의 문화적 기호 등. (이런 것들에 대해 누가 진지한 연구를 해주셨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까닭에 대한 연구 분석은 여기에서는 제쳐두자. 이 질문을 먼저 내어놓은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다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춤과 노래를 즐겼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조금은 소극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왜 하필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라는 이번 장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 조건을 삼고 싶었을 뿐이다. 좋다. 우선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 보자.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것은 관객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관객이 그것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처음 제시한 ‘우리는 왜 하필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에 대한 답과 맞닿아 있다.
호이징하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연극에 대해 공부할 때 『호모루덴스』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 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책 『호모루덴스』가 가지고 있는 오류는 있다.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이상률 번역, 문예출판사, 1994)을 쓴 프랑스의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호모루덴스』에 대하여 “이 훌륭한 책의 결점은 십중팔구 여기에 있을 것이다. 즉, 호이징하는 각각의 놀이행동에 가장 정확한 의미를 주는 내적인 태도를 연구하기보다는 외적인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따라서 놀이 자체가 만족시켜주는 욕구보다도 놀이의 형식과 규칙이 그 책에서는 보다 주의 깊은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발상에서 아마도 그 책의 가장 대담한 명제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명제는 내가 보기에는 대단히 취약하다 : 유희적인 것과 성스러움의 동일시.”
그리고 『호모루덴스』를 영어로 번역한 영역자도 그의 주석을 통해 스포츠가 상업화되면서 놀이 영역에서 벗어났다고 단언한 호이징하의 주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반박하고 있다.
로제 카이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영역자의 주석이 정확하게 무슨 내용인지가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호이징하의 『호모루덴스』에 긍정적 동의를 하면서도 굳이 로제 카이와의 반박을 싣는 것은 그 어떤 이론도 완전한 이론은 없다는 것 때문이다. 호이징하의 놀이 이론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이 1938년에 쓰인 책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기댈만한 책이냐는 의심이 된다면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호이징하의 『호모루덴스』에 그런 반박의 여지가 있다는 것으로 이 책의 공적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과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우리는 인간의 유희 본능을, 예술의 한 장르인 연극과 인간에 대해 얘기할 때는 모방 본능을 얘기하곤 한다. (다른 이론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가설이다.)
뮤지컬에는 음악과 춤, 그리고 시(즉, 가사)가 있다. 음악과 춤, 그리고 시. 왜 인간은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과 춤, 그리고 시를 만드는가? 왜 시는 우리가 말하고 쓰는 글하고는 다를까? 왜 우리의 보통 때의 움직임과 춤이 다를까? 왜 우리가 흔히 듣는 소리와 음악이 다를까?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재료에 양식을 가했기 때문이다.
시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운율과 반복, 발음과 억양이라는 법칙을 통해 탈일상적인 말로 변한 것이다. 음악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소리에 법칙을 주어 그것을 악기나 인간의 몸을 통해 보여준다.
또 인간의 움직임을 단순화하고, 반복하고, 과장하면 춤이 된다. 현대무용의 선생들은 학생들의 몸을 훈련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쓴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일상적인 움직임을 사용하는 것이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아직은 춤이 아닌 일상적인 움직임을 요구한다. 학생들은 그것을 해 보인다. 선생은 그 움직임의 속도에 변화를 요구한다. 때로는 최대한 느리게, 때로는 가장 빠르게, 다시 원래의 속도대로. 그것은 반복하도록 한다. 달라지는 속도와 반복은 박자를 만들어낸다. 어느덧 그 움직임들은 춤이 된다. 그것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교가 더해지면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법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훌륭한 무용수가 된다.
마임도 이와 비슷하다. 마임은 어떤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수많은 움직임을 가장 단순화하는데, 불필요한 잔 동작을 없애버리고 남은, 인간 행동의 정수만 남긴 움직임을 통해 관객에게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까지 이른다. 사실주의 연기마저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배우들은 그만큼 양식화에 대한 훈련을 받은 것이다.
점, 선, 면 그리고 소재의 속성이나 질감 등에 양식을 가하면 그것이 우리가 미술이라고 부르는 회화, 조각, 나아가 건축이 된다. 그것이 태양광이든 전기 장치에 의한 것이든 빛에 양식을 가하면 탈일상적인 조명이 된다.
일상의 것들을 탈일상화(또는 비일상화)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인간은 그것을 즐긴다. 직접 해보는 것도 즐기며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나 듣거나 느끼는 것을 즐긴다. 연극을 왜 굳이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표현하는가, 왜 우리는 그것을 즐기는가라는 것은 거기에서 암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유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