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맨 처음 제시한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 우선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이유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조금은 긴 산책로를 걸어왔다. 그 산책로가 조금 길어서 이 길을 왜 걷고 있는지 자칫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리를 해본다. (나도 이런 중간 점검을 해주는 친절한 글이 좋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이유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춤과 노래를 즐기기 때문은 아니며, 우리 민족의 ‘풍류도’가 다른 민족의 놀이 정신보다 차원이 높다고 하는 것에도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이유를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고-그 다른 시각을 통한 논의는 이곳에서는 펼치지 않기로 했지만- 다시 호이징하가 주장한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이론으로 돌아왔다.
조금은 싱거운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일상의 것들이 탈일상화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양식인 연극을 원하고 있는데 사회적, 역사적, 상업적 관점으로 그것을 갖춘 연극이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답은 ‘우리가 왜 하필이면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라는 질문을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국에서만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은 연극을 즐긴다. 거의 모든 원시적 연극은 원래 무용극이었고, 음악극이었고 가면극이었다. 그 유산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노래와 춤, 가면 이러한 모든 놀이 요소의 총체적인 모습이 연극이었다.
연극의 그러한 원시성은 중요하다. 그 원시성이라는 것은 야만적, 비이성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삶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울 좋은 현대 문명, 도시, 사이버 세계를 살면서 그것들을 잊어버리곤 한다. 연극은 그것을 회복시킨다. 연극이라는 것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탈일상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탈출시키는 통과의례. 그것이 연극의 기능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인기가 있는 까닭은 우리가 놀이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한국이라는 사회에 살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답답한 우리의 현실, 즉 일상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일탈의 욕구를 놀이 요소를 총체적으로 양식화한 뮤지컬이 그것을 해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경직되고 답답한 사회를 살고 있는가? 연극은 삶과 관계가 있다. 여지없이 놀이를 즐기는 인간이며, 그 목마른 삶에 대한 해갈을 원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관객은 오늘도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서 쾌적하지만은 않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극장을 향해 찾아가서 그 비싼 입장료를 내고 뮤지컬을 본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 연극을 만들어 표현하는가?’라는 창작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맺고 싶다. 뮤지컬 창작인들은 예술가로서 놀이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연극인 뮤지컬을 통해 세상을 향한 메시지와 총체적인 감동을 전하고 아울러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창작의 투쟁을 위해 오늘도 외로운 길을 걷는 창작인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이 긴 산책로 끝에 반갑게 자리하고 있는 작은 벤치에 앉자. 휴, 제법 땀도 나고 다리도 뻐근하다.